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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의역사

Campuchea, Cambodia, Khmer, Angkor, Cambodge등은 모두 크메르 민족을 뜻하는 말이다. Kambujadesa 또는 Kambuja는 전설에 나오는 Khmer문명의 시조인 북인도지방의 Kambu - Svayambhuva부족에서 유래한 Sanskrit (범어)기록에 나오는 국가이름이다.
Phnom은 산이란 뜻이며 Angkor는 도시, 국가를 뜻하는 Sanskrit 언어인 Nagara에서 파생된 Khmer어의 Nakhon을 서양인들이 잘못 전달한 발음이다. Angkor는 AD 802-1431년사이에 인도지나반도에서 매우 번성했던 유서깊은 고대국가이었다. 앙코르유적지가 있는 지방의 도시이름인 Siem Reap은 앙코르 남쪽6km지점에 있는데 "시암족을 물리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1-12세기에 번성할 때 주변국가들을 점령하여, 서북쪽으로 태국의 "피마"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지금의 "나콘"지방도 점령하였다. 앙코르 유적지의 전체 넓이는 자그마치 310km²에 달한다.

캄보디아는 미얀마, 라오스, 태국, 베트남과 비슷한 시대에 인류가 살았던 흔적을 볼 수 있다. 북서 "롱 스팬" 지방에서 BC 4천년 경부터 AD 9세기까지 5천년을 살았던 흔적이 있다. 동굴과 석기 시대의 도구들과 빗살무늬의 항아리도 발견되었다.
캄보디아의 남동쪽 지방에서는 BC 2세기에서 AD 8세기까지 살았던 흔적이 있으며, 부족국가의 형태로 분석된다. 중부의 "삼롱센"지방에서는 기원전 1,500년경에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있다. BC 1,000 - 500년사이에 끝이 나고, 중국과 인도문화를 접하면서 10세기까지 지속하게 된다.
AD 1 - 8세기사이 AD 1세기경 바닷가와 계곡에서 집단거주하며, 벼농사를 위주로 철기문화를 이루고 살던 이들에게 인도와 중국이 나타나게 된 것은 그 당시 중국과 인도의 교역로였던 중앙 아시아 지역에 유랑민족의 습격이 심해지자, 중국은 새로운 인도교역로로 남방해상로를 개척하게 된다. 중국 상인들은 인도에서 배로 벵갈만을 지나 말레이시아 반도의 중간을 육로로 횡단하고, 다시 태국만에서 선박을 이용하여 중국의 남부로 연결하면서, 캄보디아에 외국문명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또 이 때 중국인의 정착민도 생기기 시작하였다.
처음 인도 문화가 전파되고, 브라마(바라문) 승려들에 의하여 힌두교가 전파되었다. 3세기경 중국은 메콩델타 주변에 살던 민족을 "후난"으로 불렀는데, 이말은 옛 크메르어인 "프남"에서 유래한 것으로써, 지금의 "프놈" 즉 산(언덕)이란 뜻이다. 그 당시 이 지방에 살던 민족들은 "몬 크메르"족으로 보인다. 중국은 "후난"이 전설에 의해 생긴 국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산스크리트와 크메르 전설에 근거를 둔 것 같다.

크메르족의 시조에 대한 전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흔히 전래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 어느 날 물과 흙을 다스리는 "나가스"왕의 딸이 바닷가에 나갔다가 배를 타고 온 힌두의 왕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 왕자가 그만 요술의 화살을 공주에게 쏘아 공주를 혼미하게 만들고 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를 알게된 나가스왕은 이들에게 캄보디아 땅을 내주어 살게 하였다. 왕자는 도읍지를 정하기위해 창을 던져 창이 닿은 곳에 성을 쌓았다고 하며, 그 성의 이름을 "캄부쟈"라고 정하였다."

AD 초기에서 5세기 경까지 인도문화가 "후난"에 큰 영향을 주었고, 힌두교와 불교가 전래하였으며,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다가, 지금의 크메르어로 변화하였다. 또 천문학, 법률, 문학, 왕정제도 등도 인도를 따랐다. 6세기경 내분으로 인하여 후난은 내륙으로 도읍을 옮기는데, 중국의 기록을 보면 6세기후반에 "첸라"국이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첸라"국은 "후난"국을 이어 200여년간 통치 영토를 넓히었다. 8세기경에는 윗 첸라 (메콩강 북쪽, 남 라오스 지방과 똔레삽 호수 북쪽 지방)와 아랫 첸라 (똔레삽 호수 동쪽- 엣 후난국 포함)로 분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윗 첸라국이 번성하는 반면, 아랫 첸라국은 멸망하게 되는데, 이로써 후난국의 이름도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후난의 멸망에서부터 9세기초 앙코르시대까지를 앙코르 선사시대로 분류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후난과 첸라국을 크메르문명 이전의 부족국가형태로 정의하기도 하지만 불행하게도 중국의 기록이외에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2. 앙코르 시대(9 ~ 17세기)

앙코르 시대의 시작
앙코르 또는 "캄부자"는 802 ~ 1432년 사이에 매우 번성하였던 국가이다. 자야바르만 2세가 자신을 神王으로 칭하면서 앙코르시대가 시작하여 타이"가 앙코르톰도시를 점령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자야바르만"이란 이름은 5세기 경 "후난"국이 중국에 외교사절을 보낼때 후난왕의 이름이었다. (바르만 = Armour의 뜻으로 보호자로 풀이된다) 자야바르만 1세는 681년 사망시까지 첸라국을 통치하였다.  자야바르만2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크메르 왕조의 첫번째 왕의 이름으로 쓰인 것이 "Sdok Kak Thom"기록에 나오는데, 이 기록은 태국 방콕의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자야바르만2세는 자신을 왕으로 칭하기 전에 인도네시아의 "Sailendras" 왕국에 다녀 온 일이 있는데, 그 당시 인도네시아를 다녀간 페르시아 상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인도네시아의 "사이렌드라스"왕이 강과 호수를 따라 크메르로 쳐들어가 왕의 목을 베고 크메를를 속국으로 삼았다하며, 이때 자야바르만2세가 포로로 인도네시아에 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795년경 크메르로 돌아와 "인드라푸라"에 첫 도읍지를 정한다. 그리고 그후 3번을 더 도읍지를 옮기는데, 아마 식량생산이 용이한 곳을 찾아다닌 것 같다. 그중 한 도읍지가 "하리하랄라야" (현재의 "롤루스" 지방)이었다. "하리하랄라야"라는 말은 힌두교에 나오는 비쉬누신과 쉬바신의 이름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9세기초에 다시 도읍을 "마한드라푸르"산 (현재의 프놈 쿨렌)으로 옮기는데 "앙코르톰"북동쪽 40km지점이다.
802년에 드디어 그 자신을 신왕(데바라쟈)으로 칭하며, 크메르 민족을 통일하였다. 그리고는 인도네시아의 속국으로부터 독립을 하여 앙코르 문화의 대 막을 열게 된다. 동시에 자야바르만2세는 종교를 데바라쟈교로 정한다. 그 후 도읍지를 "롤루스"로 다시 옮겨 그가 사망시까지 통치를 하게 된다. 이 후의 왕들은 데바라쟈교를 숭배하기 위하여 사원들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 것은 민족통일의 카리스마가 없는 후계왕들이 백성들의 충성심을 자아내기 위하여 왕과 신을 동일시하는 데바라쟈 교의 전파를 위한 대규모 사원의 축조에 힘을 쏟았다고 분석된다.

* 인드라바르만 1세는 큰 인공호수를 만들어 관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였다. 이 당시 관개수로공사 기술은 매우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 야소바르만 1세는 조상을 위한 사원을 "롤루스"에 짓고 앙코르로 도읍을 옮겼다. 이 후 500년간을 앙코르에서 도읍하게 된다.

* 수르야바르만 1세는 국가의 조직을 강화하고 내부의 결속을 도모하여 평화를 정착하고 국민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여러 차례 "시암"(태국)족과의 전쟁에 이기어 영토를 태국만 까지 넓혔다. 그는 또 불교를 받아들여 데바라쟈교와 공존을 할 수 있게 하였다.

* 수르야바르만2세는 주변의 "시암"과 "챰"(베트남)족의 침략을 많이 받았으나, 전쟁보다는 지금 저 유명한 세계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앙코르 왓"을 축조하였다.

* 1177년 자야바르만 7세 때 "챰"족이 강과 호수를 따라 대거 침략하였으나, 그는 호수에서 수전으로 모두 격퇴하였다.  그는 캄보디아 역사에서 영웅으로 받들여지고 있다. 또 앙코르 톰을 재건하고 대승불교를 믿기 시작하였다.  그의 생존시에 영토는 베트남의 해안에서부터 말레이시아 반도와 멀리 미얀마까지 넓었으나, 그가 죽은 후부터 크메르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였다.

앙코르의 번성과 멸망

앙코르 시대에 몇몇 왕들은 세력을 넓히어 주변국들을 점령, 통치하였다.
'챰파"국은 메콩 델타에 자리잡았던 후난국의 북방, 지금의 중부 베트남 지역에 있던 나라인데, 중국의 기록에는 2세기 말에 세워진 나라라고 한다. 인도문화가 챰파국에 2-3백년간 스며들어 힌두교를 믿기도 하였으며, 인종적으로는 인도네시아 민족에 속한다.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의 챰 사원에는 이러한 기록이 남아있다. 6세기 후난국의 멸망 후 챰파는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하였으며, 13세기초에는 크메르의 지배를 받았었다. 15세기 후반 지금의 베트남 Nguyen(院)국에 흡수될 때까지는 독립국으로 있었다.
지금 태국 땅의 "몬'은 동남아시아 대륙에서 몇 세기간 지속되었던 국가이었는데 6세기 말- 7세기 초부터 11세기까지 "메남'계곡 지방에서 "Dvaravati"왕이 통치하였던 국가이다.
"피우스"국은 6세기 중반에 중부 "이라와디"강 계곡과 "시땅"강 주변에 있던 나라이었다. "몬"의 인근지방에 있었던 "페구"국은 9세기초에 건국한 국가이다.  `11세기에 북쪽의 Burma족이 번성, "피우스"를 점령하고 "페간"에 도읍, 페구국을 세운다.
중국의 기록을 보면, 인도네시아섬에는 2개의 왕국이 다투고 있었는데, 그 중 "스리비자야"부족이 후난을 점령하고, 수마트라에 6세기말에 나라를 세운 뒤, 그 세력은 서 "자바"와 말레이시아 그리고, 남부 태국의 "챠이야" 지방까지 뻗쳤다. 그러다가 11세기에 와서 "순다"와 "말라카"에 해적이 많아지면서 교역이 줄어들어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였다.
사이렌드라스왕조는 중부 자바에서 8세기 말에 번성했던 국가인데, 100년이 못되어 스리비자야를 흡수한다. 9세기 중반에 "보로부두"불교 사원을 축조하였고 13세기까지 국가를 유지하였다.

태국(타이)은 크메르영토를 수시로 침략하였던 국가이다. 태국의 첫번 조직적인국가로 볼 수 있는 "수코타이"국은 태국 북부 중앙에 13세기에 자리잡았다. 캍은 시기에 태국의 "란나" 공국은 "칭마이"에 도읍하게 된다. "타이"는 "챠오프라야" 강 허구를 지배하면서 14세기 중반에 "아유타"왕국을 세웠다. 100년이 못되어 "타이"는 현재 태국영토내에 거의 모든 부족을 지배하게 된다. "아유타"국은 1767년에 버마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권력을 장악하였다.  "타이"는 1353년에 앙코르를 일시 점령하나, 크메르는 이를 다시 탈환하기도 하며 전쟁을 끌었다. 결국 두 나라간의 전쟁은 1431년까지 1세기를 끌다가, "타이"(시암)가 앙코르톰 도시를 점령하므로써 크메르는 도읍지를 남으로 옮기게 된다.

"타이"의 세력확장이 크메르를 망하게 하는 주 원인이지만 크메르가 망한 이유에는 몇몇 다른 이유도 있었다.
첫째, 스리랑카에서 13세기 때에 발생하여 버마, 태국을 거쳐 건너온 남방불교 (흔히 소승 불교라고 하는)가 앙코르에 전파되면서, 기존의 대승불교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 남방불교(테라바다)는 힌두교 사상을 기본으로하는 새로운 교리를 주장하였는데 즉, 대승불교보다는 좀 더 자기진취적인 사상으로 왕권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종교의 교리에 의하여 고무된 백성들이 왕정구조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내부 조직을 와해시켰다.
둘째, 1세기에 걸친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손실과 종교적인 내분은 관개 수로시설의 보수 유지를 하지 못하게 하였고 이것이 식량생산 감소로 이어졌으며 거대한 사원들의 축조 또한 엄청난 국력의 손실을 가져왔으며 거기에 질병까지 만연하게 되었다.
셋째, 중앙권력이 약해지자 주변 속국들이 하나, 둘 독립하기 시작하였다. 앙코르에서 패망한 크메르는 1516-1618년 사이에 "롱벡"과 "오동"에 잠시 도읍하다가, 16세기후반에서 17세기사이에 잠시 앙코르로 다시 도읍을 옮기기도 했으나, 타이에 다시 밀려 1861년에 지금의"프놈펜"으로 도읍을 옮긴다. 이 당시에는 메콩델타를 이미 안남(베트남)에 빼앗겼고, 똔레삽호수의 서쪽과 북쪽은 타이가 점령하여, 크메르는 사실상 바다가 없는 나라가 되고 만다.

1863년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점령하여 식민통치를 할 때 "바탐방"과 "시엠립"(앙코르)은 제외되어, 사실상 타이(시암)의 지배하에 있었다. 1907년 태국과 프랑스간의 조약에 의하여 이지역을 프랑스령으로 하므로써, 간접적으로 국토를 회복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 후 조약이 흐지부지 되면서 Khao Orah Viharn사원이 있는 동렉산맥 동쪽지역이 태국과 캄보디아간에 영토 분쟁이 생기게 된다. 그러다가 1962년 국제법원에서 이 지역을 캄보디아 영토로 인정하기는 하였으나, 캄보디아쪽이 절벽이라 이 사원에 출입을 하려면 태국 땅을 통하여야 하는 이상한 경계가 되어 버렸다. 앙코르의 북동 쪽에 있는 "반테이 스라이" 사원도 역시 태국 땅에 있었으나 1941년에 일본의 중재로 태국과 프랑스간에 캄보디아 영토로 합의하였다.

크메르인들은 대규모 관개시설과 수로공사에 탁월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는 식민 통치 기간뿐 아니라 1972년 캄보디아 내전으로 철수할 때 까지 꾸준히 앙코르 유적지를 보수하여 주었다. 1980년대초에 UNESCO가 이 유적지 복원 사업을 다시 재개하고자 건축전문가와 석공들을 재 모집하였는데 과거 프랑스 휘하에서 일했던 기사나 석공들이 거의 폴포트정권동안 죽임을 당하여 1,000명 중 5명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앙코르는 1972년 내전에 의한 파괴보다도 비와 밀림, 그리고 도굴범에 의한 피해가 더 큰 것으로 조사, 발표가 되었다. 앙코르 왕국이 통치했었던 주변국가, 연대, 위치 등 비교표

국명 통치 기간 현재의 국가 (위치)
Champa 2-15 세기 남부 베트남
Dvaravati 6,7-11 세기 태국
Pyus 6-11 세기 미얀마
Sailendras 8-9 세기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
Srivijaya 8-13 세기 말레이반도, 남부 태국
Pegu 9-11 세기 미얀마
Pegan 11-13 세기 미얀마
Sukhothai 13-14 세기 태국 북부 중앙지대
Lanna 13-16세기 북부 태국
Ayutthaya 14-18 세기 중부 태국


3. 식민지 시대와 독립 이후

1) 프랑스 식민시대

19세기에 들어서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비롯하여 인도지나 반도를 점령하게 되는데, 그로 인하여 "시암"족 및 "챰"족 등의 침략에 의한 국토손실은 더 이상 없었다. 1863년 캄보디아는 프랑스와 신탁통치 조약을 맺게 되며, 1884년에 프랑스는 왕의 권한을 대폭 제한시켜 버린다. 국민의 노예화와 국토의 식민지화가 심화되고 왕은 상징적일 뿐이었으며 프랑스군의 총독이 통치를 맡았다. 프랑스는 왕위의 계승도 간섭하였으며 과세를 중과하고 세금을 납부할 수 없는 국민은 1년에 3개월의 강제노동으로 가름하게 하였다. 70년에 걸친 식민지 통치 기간 중 물론 저항도 상당히 많았다.

2차 세계대전 중에 한 때 일본이 점령하였으나 미얀마,인도쪽으로의 진격이 급하여 편의상 프랑스의 총독에게 통치권을 그대로 일임하여 두었다. 프랑스와 일본은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같이 앙코르 유적지의 탐사를 협력했던 관계가 있다.
1941년 총독은 지금의 노로돔 시아누크 왕자를 왕으로 책봉한다. 그리하여 노로돔 시아누크 왕이 탄생하게 된다. 시아누크 왕자는 1922년 10월 31일 생으로 프놈펜에서 출생, 한때 프랑스령인 사이공에서 공부하기도 하였다. 프랑스는 시아누크 왕자가 친 프랑스파가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후 시아누크는 1945년 3월, 일본의 패전이 가까워지자 일본에 대해 독립을 선언하고 투쟁을 시작하여 종전이 된 후, 1946년 초에 프랑스군이 다시 진군하자 발언을 높이어 캄보디아의 자주권과 정당 결성권의 인정을 받아낸다. 이 때 2개의 정당이 결성되었는데 독립당은 독립추진을 원칙으로 하였고 민주당은 개혁추진을 원칙으로 삼았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공산 "베트민"과 전쟁 중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캄보디아의 독립운동도 막아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되었다. 1952 - 1953년 사이에 베트남 북서쪽 산악지방인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베트민군에 대패하게 되고 그 부산물로 캄보디아도 완전 독립을 할 수 있게 된다.

2) 독 립

1955년 4월 시아누크 왕은 좀더 강력한 통치력을 갖기 위하여 부친 "노로돔 수라마릿"왕으로부터 정식 왕위계승을 허락 받는다. 그는 사회주의 정당인 "상쿰"당을 결성하고 당 총재직을 맡으며 1955년 선거에서 "상쿰"당이 승리하자 자신을 연방정부 수령 및 국가 주석으로 호칭하게 하였으며 그 이후 아직까지 대다수 국민들은 그를 민족의 아버지로 부르고 있다. 1954년 독립에서 1970년 "론놀"수상의 쿠테타 때까지 캄보디아를 중앙집권체제로 통치하였다. 1960년 부친 수라마릿 왕이 서거하자 국회에서 합법적인 연방정부 수령으로 임명하게 된다.

3) 내전과 격동의 시절

1960년 중반에 가서 사회주의체제의 고수와 월맹과의 관계가 깊어지자 미국과의 관계가 불편해 지기 시작한다. 결국 미국의 원조가 중단되면서 국민들의 생활이 어렵게 되고 또 체제 때문에 경제발전이 둔화되자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게 되어 그의 카리스마적인 위치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국민들의 일부는 "Saloth Sar"(나중에 "폴 포트"로 더 잘 알려진)가 이끄는 크메르 공산당(KCP=Khmer Communist Party)에 동조 및 가입하게 되고 크메르 루지(Khmer Rouge=붉은 크메르)는 계속적으로 반 시아누크 운동을 전개한다.
이 당시 캄보디아의 중립성이 국제문제화 되었는데 이는 월맹군들이 캄보디아 내에 거주하면서 호치민 루트로 캄보디아 영내를 이용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1965년 미국과 외교단절을 하게 되는데 이때 사실상 시아누크는 중립국의 입장에서 월맹과 비밀외교를 유지하고 있었다. 1969년 월맹의 지도자인 호치민의 장례식에 외국정부 수뇌로는 유일한 참석자가 시아누크 왕이었다. 미국의 원조중단 이후 지도력이 약해진 시아누크 왕은 침체한 경제를 부흥해 보고자 다시 미국과 국교를 맺기 위해 1968년 6월에 인도주재 미국대사였던 "Chester Bowles"와 모종의 협약을 하게 된다. 이때 "손 산"이 시아누크 왕을 보좌하였다. 그 만남이 있고나서 몇 달 뒤에 미국은 캄보디아내에 있는 월맹군의 거점에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4) 론놀 수상의 쿠테타

1970년 3월 22일 소련을 공식방문 중이던 시아누크 왕은 미국에서 잘 훈련 받은 직업군인인 "론놀(Lon Nol)" 수상의 쿠테타에 의하여 정권을 빼앗기게 되고 그때부터 중국과 북한을 떠도는 망명생활이 시작된다.  "론놀"은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을 수립하고 왕정제도를 폐지한다.  그리고 친왕파 및 공산주의자들을 대거 검거,처형 함으로써 역시 국민들의 인심을 얻지 못하게 된다.  이에 대항하여 북경에서 망명 중이던 시아누크 왕은 중국의 비호 아래 한때 정적이었던 크메루 루지와 동맹을 맺고 같이 론놀정권에 대항한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론놀정권에 대해 월맹도 위협을 느끼게 되자 월맹군은 남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같이 공격하게 된다.  그리하여 북동쪽 산악지역은 사실상 월맹군이 장악을 하고 크메르 루지 또한 중국의 지원을 받아 북쪽 및 남서쪽 산악지역을 장악한다.
그러자 론놀을 지원하고 있던 미국은 1973년 베트남 철수 직전에 캄보디아 전역에 걸쳐 크메르 루지 거점과 월맹군 거점에 대규모 폭격을 감행하였고 이때 캄보디아 민간인들도 15만명 이상 살상을 당하였다고 한다.  또한 많은 도로,교량 및 발전소도 파괴되었다.  이 폭격으로 인해 캄보디아 국민들은 미국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게 되고 친미적이면서 극도로 부패한 론놀정권 보다 크메르 루지 쪽에 가담하는 자가 많았다.  이 당시 시아누크 왕은 국민들에게 크메르 루지와 함께 론놀 정권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권유하였으며 이것은 지금에 와서 크메르 루지의 대학살 책임이 왕에게도 있다는 여론을 생기게 하여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증언을 요구하기도 한다.  월맹과 중국의 지원으로 잘 훈련된 크메르 루지군은 론놀과 그 추종자들을 수도 프놈펜으로 몰아 넣었고 프놈펜은 피난민으로 인구가 한때 250만명을 넘었었다.

5) 크메르 루지의 정권 장악

1975년 4월 17일 남베트남 패망 13일 전에 미국이 베트남에서의 철수작전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크메르 루지군은 총공세를 펴서 프놈펜을 함락한다.  "폴포트"는 국호를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DK)"로 바꾸었으며 이때부터 캄보디아 역사상 가장 불운했던 시절이 시작되었다.  세계 최대규모의 주민 소개 계획이 진행되었고 프놈펜의 모든 거주자가 지방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후 4년간의 폴포트 통치기간 중 전 국민의 1/3가량 되는 약 200만명이 고문,처형,중노동,질병,기아 등에 의하여 죽었다.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들은 학생까지 포함하여 모두 처형되었으며 국내에 있던 외국인들은 거의 간첩혐의로 처형되었다.  안경을 썼거나 손바닥에 못이 박히지 않은 사람들은 부르조아지로 분류, 처형하고 외국책을 가지고 있거나 양담배를 피우던 사람들은 간첩으로 처형하였으며 동맹군이었던 월맹군 중 캄보디아에 남아있던 월남인들도 간첩으로 처형해 버렸다.  이 학살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캄보디아에는 전문인력과 지식인이 부족한 상태이며 국가공무원, 고급 군인들 중에는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기간 동안 국적을 캄보디아로 바꾼 베트남인들도 많이 있다.  이 학살의 주범은 물론 "폴 포트"였는데 그는 1949년에 전기학을 배우기 위하여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으나 성적이 좋지 못하여 졸업을 하지 못하고 대신 공산주의 이론을 배우고 귀국하였다.

1953년 귀국하여 공산당에 가입하고 간부로 활약하였으며 1953년에 캄보디아 노동당 총비서로 선출되었고 나중에 캄보디아 공산당(KCP)의 창당자가 된다.
1975년 크메르 루지가 정권을 장악하고 나서 "론놀"과 관련된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족까지 포함하여 모두 처형되었다.  폴포트 집권동안 이러한 처형은 끝없이 계속되었고 프놈펜 시내에 있던 "툴스랭" 고등학교 자리에 S-21이라는 보안부대를 설치하여 고문장소로 사용하였다. 이 학교는 지금 그 당시의 참상을 보관하고 박물관으로 공개하고 있는데 당시의 피해자들의 사진까지 전시하고 있다.
론놀은 그 당시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후에 하와이에서 사망하였다. 1979년 유엔 인권위원회는 이 학살 사건을 "나치" 이 후 가장 잔인한 학살 행위로 규정하였다.
크메르 루지는 계급이 없는 사회를 부르짖었고 사유재산의 몰수와 함께 화폐개혁을 하였다.  그 당시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농토는 잘못된 대규모 수로공사를 하는 바람에 못쓰게 되어 버렸다.  또 그 사이에 폴 포트는 캄보디아 내에 있던 베트남 공산군도 모두 처형함으로써 공산 베트남과 동맹관계가 끊어지고 역사 속에 도사리고 있던 잠재적인 반 베트남 운동이 시작된다.  당시 시아누크 국왕이 귀국하였으나 가택연금을 당하였다가 후에 중국의 도움으로 다시 중국으로 망명한다.  크메르 루지는 19세기에 빼앗긴 메콩 델타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에 산발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결국 공산 베트남의 침공을 받게 된다.
(일설에는 호치민 루트로 캄보디아 땅을 이용하는 대가로 월남이 공산화가 되면 메콩 델타의 과거 캄보디아 땅을 돌려주기로 호치민과 시아누크 국왕 사이에 약속이 있었으나 호치민이 1969년 죽으므로 인해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폴 포트가 선 공격을 했다고도 한다).

6) 공산 베트남의 침공과 괴뢰정권 수립

1978년 12월 건기가 시작되고 2개월 쯤 지나 땅이 마르자 베트남은 크메르 루지에서 이탈하여 베트남으로 망명한 행 삼린, 훈센 등 현재 캄보디아 정부의 주요 인물들을 앞세우고 대대적으로 캄보디아 침공을 시작하여 불과 1개월만에 (1979년 1월) 프놈펜을 함락하고 크메르 루지군을 밀림 속으로 몰아내었다. 이 당시 공산 베트남은 과거 포로였던 남부 베트남군을 다량 투입하였다.  이것은 중국이 장개석 군대의 포로들을 투입한 것과 같은 소모 전술이었다.  
크메르 루지와 베트남은 같은 공산국가이며 또 동맹군이었는데 다시 적이 된 것은 당시 중국과 쏘련의 대립이 작용한 부분도 많다고 본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이 있자 중국과 베트남 간의 국경 분쟁이 또 발생한다.  외곽 지역으로 밀려난 크메르 루지군은 중국으로부터 외교, 정치, 군사적 지원을 계속 받아왔다.  특히 외교적으로는 학살 행위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힘에 의해 공식적으로 캄보디아의 마지막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받고 있었다.  크메르 루지군은 계속적으로 게릴라전을 펴서 베트남군에 대항하였다.  운 졸게도 그들의 은신처에서는 많은 보석과 금이 생산되었으며 원목도 태국 상인들에 의하여 많이 팔 수 있었다.
공산 베트남에 의해 수립된 "캄보디아 인민공화국" (PRK= People's republic of Kampuchea) 은 "행 삼린" 당 총비서가 통치하게 된다.  베트남의 점령기간동안에는 쏘련과 동구권 국가들이 많이 원조를 해 주었다.  또 호주, 인도, 스웨덴 등에서 온 비 정부단체 (NGO)들이 인도적인 차원에서 지원을 많이 해 주었다. 미국의 폭격으로 못쓰게 된 '끼리롬" 수력 발전소는 북한이 수리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캄보디아의 정치 판도는 베트남에 의한 "행 삼린" 괴뢰정권에 반대하는 파가 많았는데 여기에는 물론 크메르 루지와 시아누크 국왕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 세력은 노령의 민족 주의자인 "손산"이 이끄는 "크메르 민족 독립전선" (KPNLF= Khmer People's National Liberation Front)당과 시아누크 국왕이 이끄는 "중립, 우호, 평화적인 캄보디아를 위한 국가연합전선" (FUNCINPEC=National United Front for an Independent, Neutral, Peaceful and Co-operative Cambodia) 당이었다.
1979-1992년 사이 공산 베트남이 세운 PRK에 반대하던 이들은 주로 시아누크 왕이 지휘하였다.  1979년 베트남 침공 당시 태국 수상은 베트남의 공산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프랑스에 있던 "손 산"을 만나 태국에 거점을 두고 베트남과 싸우라는 제의를 하였다.  또 사실 태국은 크메르 루지군을 옆에서 많이 도웁기도 하였다.  한편 태국의 이러한 제의를 받은 손산은 힘을 얻어 귀국하여 KPNLF를 결성한다.
베트남의 공산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낀 ASEAN 국가들은 크메르 루지를 위시하여 캄보디아의 반 베트남 세력들을 통합하도록 도와주고 이 통합세력을 시아누크 국왕이 이끌도록 한다. 이 통합 세력의 명칭은 "민주 캄보디아 연립정부" (CGDK= Coalition Government of Democratic Kampuchea)라고 칭하였다.  이 망명정부는 중국의 협조로 UN의석을 계속 고수할 수 있었으며 특히 크메르 루지는 캄보디아의 마지막 합법적인 정부의 자격을 고수한다.  망명정부가 UN의석을 고수하기는 이 것이 처음 케이스였다.  1987년에는크메르 루지군을 포함한 25만의 캄보디아 난민이 태국 국경의 난민촌에 모였다.  강대국들은 이익에 따라 캄보디아의 각각 다른 정치 집단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베트남에 대한 감정이 있어서 인지 대 학살을 자행한 크메르 루지가 속해있는 망명 정부 CGDK를 지원하였다.

7) UN의 개입과 베트남군의 철수

국제적인 압력에 의하여 1989년 9월에 베트남 군은 10년 8개월 만에 캄보디아에서 철수하게 되는데 점령 기간동안 평균 10만명의 병력을 상주시켰다. 베트남군이 철수하자 캄보디아에는 집권을 노리는 4개 정당들의 각축이 시작된다.  1989년 4월 지금의 수상인 "훈센"은 "캄보디아 자치단체" (SOC= State of Cambodia)를 결성하고 1년 뒤에 이를 지금의 여당인 CPP (Cambodia People's Party)로 이름을 바꾸고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1989년 프랑스 정부는 캄보디아에 관한 의제로 파리 국제회의를 주관하여 캄보디아 내 정치적 문제를 해결코자 하여 20여개국의 대표들과 국내 4개 정당 대표들, 그리고 UN비서국 등을 이 국제 회의에 참석토록 하였다.   1991년 7월 17일 시아누크 왕은 일단 "민주 캄보디아 연립정부(CGDK)를 사임한다. 그 당시 즉 1991년 1월의 파리 회담에서 크메르 루지는 파리 평화회담의 주요 안건을 대폭 수락하고 정권 참여를 시도하였으나 무장 해제의 조건을 거부하는 바람에 선거에 출마할 수 없게 되었다.
1991년 11월 14일 시아누크 왕은 참으로 오랫만에 프놈펜 공항에 도착하였다. 이 때 공항에서 왕궁까지 북한의 김 일성이 보내 준 18명의 북한 경호원의 구보 경호를 받는다.  혼란이 극심했던 시절이라 캄보디아인의 경호를 믿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귀국하자 왕은 캄보디아 상원국회 (SNC =Supreme National Council of  Cambodia)에 의하여 "중립 내각 의장"직을 맡게 된다. 1992년 후반에는 과로로 인하여 북한과 중국 등에서 휴양을 하다가 UN군이 파견되고 UN감시하에 선거가 임박하자 다시 귀국한다.

8) UN감시하의 총선거와 정부 수립

"캄보디아 주둔 임시 UN통치단" (UNTAC= United Nations Transitional Authority in Cambodia)의 임무는 SNC를 도와 1993년 5월의 총선거를 감시하고 지방에 산재한 각 군사 집단의 무장 해제를 담당하며 태국 국경에 밀집한 난민들을 다시 고향으로 안전하게 귀향 시키는 임무들이었다.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투표의 결과는 "라니릿드"왕자가 이끄는 FUNCINPEC당이 58석, "치아심"이 이끄는 CPP당이 51석, 손산의 KPNLF에서 새로이 창당한 BLDP (Buddhist Liberal Democratic Party)당이 10석, 기타 1석 등 총 120석이었다.  그리하여 국회의석 수에 따라 FUNCINPEC당의 라나릿드 왕자가 단독 수상이 되었으나 후에 CPP당에서 출마 했던 "훈센"이 지방 투표가 부실했기 때문에 투표가 불공정하다고 주장하자 라나릿드 왕자는 양보하여 공동 수상제를 제의, 제 1 수상직을 맡고 훈센이 제 2 수상직을 맡게 된다.  이 연립정부 체제의 구성은 헌법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어쩔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 것은 의석수의 3분의 2가 찬성을 해야만 국회 통과가 가능하였기 때문에 라나릿드 왕자의 FUNCINPEC당 단독으로는 아무 법도 통과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2년 3월, 40여개국에서 21,000명의 UN군이 캄보디아에 도착하여 주둔하는 기간동안 20억불이 넘는 외화가 유입되어 캄보디아의 경제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 UN군은 AIDS를 몰고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어쨌든 UN군의 도움으로 470만의 인구가 유권자 등록을 하고 그 중 90%의 투표율을 보였다.  또 난민들은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각 지방에서 군사집단, 특히 크메르 루지군의 무장 해제는 실패하였다.  놀랍게도 크메르 루지군은 투표를 방해하지는 않았으나 그 들은 신 정부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1993년 9월 24일 시아누크 왕은 신정부 법에 의하여 새로이 왕위에 오르고 말레이시아계로 현 왕비인 "모니크"도 정식 왕비가 될 수 있게 된다.

9) 현재의 국내 정세

그 동안 폴 포트는 비록 신 정부가 들어섰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세운 "민주 캄푸치아"의 국호와 군대를 이끌고 있었으며 당 중앙위원회의 의장직을 고수하고 있었다.  북쪽 태국 국경 지방인 "안롱벵" 도시가 이 들의 본부였으며 막강한 군사력과 태국에서 사들인 무기로 무장하고 또 사방에 지뢰를 깔아놓아 정부군은 감히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 들은 수시로 납치와 산발적인 공격을 하엿다.  1994년에는 프놈펜에서 콤퐁솜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유럽의 배낭족 3명이 현재 수감 중에 있는 "눈팟 " 등에 의해 납치, 살해되었으며 UN군의 차량이나 물자도 가끔 탈취 당하였다.  또 열차를 습격하여 수십명을 살해 하기도 하였고 똔레삽 호수 주변에 많이 사는 토속 베트남 인 어부 가족들을 무차별 기관총 난사를 하여 살해하기도 하였다.
또 이들의 주거지에서 생산되는 보석과 원목에 의한 수입이 좋아서 군인들에 대한 대우가 정부군 보다 월등히 좋다보니 조직이 와해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96년에 민주 캄푸치아 시절 부수상 겸 외무 장관을 지냈던 소위 4인방의 하나인 "앵 사리'가 조직을 이탈, 정부측에 투항하였는데 대신 서쪽에 루비와 사파이어가 많이 생산되는 "파일린" 지역을 그들만의 자치구로 인정받고 또 과거의 계급과 직위를 현 정부에서도 인정하며 국왕의 사면을 전제로 하는 조건을 앞세웠지만 다급한 정부는 이를 모두 수락하여 투항을 받아 크메르 루지의 와해 공작을 시작한다.
파일린 헬기비행장에서 있은 투항식장에서는 즉석에서 군복을 바꾸어 입고 국기도 바꾸어 게양한 다음 다시 재 무장을 하고 밀림 속으로 재 배치되었다. 당시 본인도 이 지역에서 2년간 생활한 적이 있었다.  아직도 남북이 팽팽히 대결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참 이해하기도 힘들지만 부러운 느낌도 들었다.

1997년 7월 3일, 프놈펜에서 또 한 차례 내전이 발생하였는데 제 1수상과 제 2수상 즉, FUNCINPEC당과 CPP 당 간에 무력 충돌이 생긴 것이다.  문제는 이 나라의 군대도 각 정당으로 갈라져 있다는데 큰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즉, 한나라에서 여당과 야당이 각각 군대를 관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는 CPP가 우세하여 불법 쿠데타라는 주변국들의 비난 속에서도 정권을 단독으로 잡게 되고 FUNCINPEC당은 도망 가던가 아니면 CPP군대에 의해 살해되기도 하고 또 많이 체포가 되었다.  남은 FUNCINPEC당은 결국 제 3국이나 또는 국경으로 가서 옛 동지라고도 볼 수 있는 크메르 루지군과 합치게 되었다.
태국을 위시한 주변국들이 이 사건을 불법 쿠데타로 보고 "훈센"을 비난하자 이 틈에 크메르 루지군들은 " 우리는 더 이상 크메르 루지가 아니다, 우리는 제 1수상인 라나릿드 왕자의 FUNCINPEC당을 지지하며 불법 쿠데타를 일으킨 베트남의 꼭두각시인 CPP당과 훈센을 상대로 싸우고 정권을 회복하겠다" 라고 공식 발표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캄보디아는 또 다시 전화에 휩싸이어 1998년 중반까지 "안롱벵" "삼롯" 그리고 동북부 밀림에서 산발적으로 CPP군대와 "훈신팩+크메르 루지"군대간에 전투가 계속 되었다.  그러나 "앵 사리"의1996년 크메르 루지 이탈은 크메르 루지에게 매우 치명적이어서 그 이 후 많은 크메르 루지군이 태국땅을 통해 "파일린"지역으로 모여들었으며 안롱벵"에서도 폴 포트의 지도력이 약해지고 내부 분열이 발생, 그 해 "손 센" (크메르 루지 정 당시 문교부 장관)이 프놈펜 정부와 내통한다는 혐의로 가족 모두가 갑자기 처형되자 세력이 분산되기 시작하였다.  또 갑자기 "폴 포트"기죽자  "키우 삼판" (당시 수상)은 태국 의사들을 불러 폴 포트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규명하고 서둘러 화장을 해 버린다. 오랜 전투에도 CPP군대는 안롱벵을 점령하지 못하고 있다가 주변국들과 국제 여론에 밀린 "훈센"은 "라나릿드"왕자의 재 입국을 막을 수가 없었고 다시 UN의 통제를 받으며 1998년 말에 재 선거를 치르게 된다.  그러나 이미 조직이 와해되고 충신들은 암살되었으며 재원도 없는 상태에서 결국 "라나릿드"왕자는 근소한 차이로 수상을 "훈센"에게 빼앗기고 본인은 국회의장직을 맡게 된다.  그러나 CPP당 역시 국회의석의 3분의 2를 채울 수가 없어 다시 '훈신팩"당과 연립정부를 구성 해야만하는 운명에 처한다.  도대체 적이 될 수 없는 헌법제도인 것이다.

안롱벵에서는 이제 훈신팩 당이 다시 떠나자 크메르 루지 역사의 마지막 정리를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파일린의 앵 사리는 키우 삼판과 그 외 크메르 루지의 거두들을 훈센의 정부에 투항케 하고 이 들을 프놈펜으로 데리고 와서 예전에 부하였던 훈센 수상에게 항복을 시키며 훈센 수상은 이 노장들을 파일린에서 편히 살 수 있게 하고 왕의 사면을 받아 주었다.  그리고 크메르 루지 군대와 훈신팩 당의 군대들은 일부 정부군 편입을 하고 상당수를 해산시켜 또 다시 있을 수 있는 무력 충돌의 가능성을 없애 버렸다. 1인당 250불이 좀 넘는 정도의 군인의 퇴직 비용은 일본을 위시한 원조국가들이 부담하였다.  단, 1994년 3명의 외국인을 납치, 살해 한 "눈팟"과 국방장관을 지냈으며 악명이 높았던 "타목"과 그 외 몇몇은 본보기로 체포, 구금하였다.   이 들을 국제사법재판에 회부하고자 UN과 미국은 압력을 가하지만 "훈센"은 계속 내부적인 문제로 간주, 캄보디아 내에서 재판하겠다고 하며 단, 외국 판사의 참가는 허용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최근에는 3명의 캄보디아 판사와 2명의 외국인 판사로 재판을 하되 재판 결과는 4명의 판사가 합의하여야 한다는 묘한 공식도 발표가 되었다.  또 중국은 그 동안 크메르 루지의 실질적인 지원자이었으므로 이 들의 UN출석 재판을 계속 거부하였다.

1999년, 이제 캄보디아는 1863년 프랑스 침공이래 136년 만에 처음으로 내전도 끝나고 침략도 없는 평화로운 나라로 새로 시작한다.  주변국들도 이제는 이 나라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여 ASEAN회원국 가입을 허락한다.  그 동안 보류되었던 원조 자금들이 1999년 후반부터 갑자기 들어오기 시작한다.  무한한 지하자원과 광활한 영농지를 가진 이 나라는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개방정책으로 또 MFN과 GSP 수혜국으로써 빠른 성장과 발전이 기대되고 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