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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폴폿 (본명;사롯사) : 1975 - 1979 사이 “민주 캄푸치아 - Democratic Kampuchea” (약자 DK)의 수상. 크메르 루지 (붉은 크메르)를 총지휘. 1997년 6월 25일 인민재판에 의하여 자택 연금을 당하다가 1998년 4월 15일 사망.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통치하던 시절 파리에 전기학을 배우러 국비 유학을 갔으며 그 때 프랑스에서 마르크스,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 이론을 공부하고 나서부터 히틀러 이후 최대의 대학살을 자행한 장본인.

눈체아 (본명;롱본럿) : 민주 캄푸치아 인민 대표 회의(국회)의장. 1998년 12월 정부에 투항.

이엥사리 (본명;킴짱) : 민주 캄푸치아 외무장관 겸 부수상. 폴폿과 같이 파리 유학을 했으며 폴폿의 여동생과 결혼. 1993년 정부군을 상대로 한 전투 재개를 거부하다 모든 관직에서 실권, 파일린 지역 크메르 루지 군대의 지원을 받고 1996년 정부에 투항, 9월에 왕으로부터 국제 사법 심판을 포함한 전면 사면을 받음.

타목 (본명;액츤) : 크메르 루지군의 총 참모총장. 백정이라는 별명. 지뢰로 한쪽 다리를 잃음. 마지막에 상관인 폴폿을 체포하고 권력을 잡았으나 심복의 배반으로 1999년 3월 7일 태국 쪽 밀림에서 체포, 현재 프놈펜의 감옥에 구금 중. 태국 정유 회사 Petronas의 주주이며 사돈간이라는 설도 있음.

키우 (본명;손센) : 민주 캄푸치아 국방 장관 겸 부수상. 국가 안보 담당. 아내 “윤얏”은 당시 문교부 장관으로 부부가 같이 학살의 주범. 1997년 6월 10일 폴폿의 심복 “소사론”에 의하여 가족 10여명과 같이 살해당함.

햄 (본명;키우삼판) : 민주 캄푸치아의 대통령. 폴폿의 최 측근으로 타목에 의해 폴폿이 체포되는 마지막 날까지 폴폿과 같이 있었음. 1998년 12월 정부에 투항. UN 통치 때 민주 캄푸치아 정부의 대표 자격으로 신정부 수립 회의 등에 참가.

께팍 (본명;께빈) : 국방 차관. “콤퐁참”과 “오동” 지역의 1970년대 민간인 대학살의 주범. 크메르 루지 상임위원 50인 중의 하나. 1998년 3월 실권을 잡은 타목과 싸워 타목을 태국 쪽으로 쫓아 냄.

소사론 : 폴폿의 경호 실장 및 친위대 대장. 1997년 6월 10일 폴폿의 지시로 손센을 죽이고 나중에 타목에게 잡혀 1997년 7월 25일 인민재판을 받고 1998년 3월 26일 처형당함.

타 (본명;껨템) : 국방부 선임 지휘관. 나중에 국방 장관. 타목의 지시로 폴폿을 체포. 1998년 정부에 투항, 현재 정부군 부사령관.

훗보 : 파일린 지역 중대장. 타목의 정벌군과 전투를 벌임.

이엥붓 : 이엥사리의 아들. 타목이 파일린을 정벌하려는 정보를 입수, 발표하여 파일린의 크메르 루지들을 뭉치게 함. 현재 파일린 시의 부시장. 중국에서 헬기 조종 훈련을 받았고 중국어, 태국어에 능통.

니엣 : 폴폿의 경호원으로 폴폿의 지시로 태국에 구원 요청을 갔다가 타목에게 폴폿의 위치를 알려주어 폴폿을 체포케 함.

께창 : 께팍의 딸. 안롱벵에 살며 아버지인 께팍이 불량 군복을 보급한 죄로, 또 평소 왕을 존경한다는 죄로 실권했다고 주장.

메스뭇 : 타목의 사위로 군 지휘관. 1998년 12월 정부에 투항.

이엠빤 : 타목 휘하의 사령관. 1998년 12월 정부에 투항.

눈놉 : 타목의 재무 담당관. 폴폿을 투옥한 자들 중의 일원. 1998년 12월 정부에 투항.

켐눈 : 타목 휘하 군대의 참모장. 1998년 봄에 훈센과 같이 일하느니 자살하겠다고 하였으나 그 해 12월 4일 크메르 루지와 훈센 정부와의 마지막 협상을 주도함.

이친 : 폴폿의 호위병 출신으로 파일린 지역 크메르 루지 405 사단장 출신. 현재 파일린 시장이며 이엥사리를 양아버지로 섬기며 따르고 있음. 전향한 “키우삼판”, “눈체아”, “이엥사리” 등의 원로들을 태국 국경 가까운 곳에 주거지를 마련해 주고 보호하고 있음. 사업 수완이 좋고 통솔력과 판단력이 매우 뛰어나다.


크메르 루지 몰락 진행의 시간적 도표

1998. 8. 8 : 크메르 루지 방송이 이엥사리를 배반자로 규정, 방송.
1996. 8.15 : 이엥사리가 폴폿의 크메르 루지로부터 이탈하여 범 민주국가 연합 운동을 시작.
1996.11. 6 : 파일린에서 수천 명의 크메르 루지군이 투항 및 정부군 합류 기념식을 가짐.
1997. 6.10 : 안롱벵에서 “손센”이 살해당함.
1997. 7. 3-6 : 프놈펜에서 CPP 당과 푼신팩 당간에 전투 발생.
1997. 7.25 : 안롱벵에서 “폴폿”의 인민재판 집행.
1997.10. : “폴폿”이 처음으로 서방 기자 Nate Thayer와 인터뷰.
1998. 2. 9 : 안롱벵에서 크메르 루지 보병들이 대거 정부에 투항.
1998. 4.15 : “폴폿”이 태국 국경 근처 가택 연금 중이던 목조 건물에서 사망.
1998. 5. : 파일린의 군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훈센 수상의 의뢰로 삼롯 지역을 공격, 푼신팩과 연합한 크메르 루지군을 평정, 태국 쪽으로 몰아 냄.
1998.12. 5 : 쁘리아 비히르 지방에서 크메르 루지의 군 고위층 중 “껨눈”, “눈놉”, “껨켓”, “임판”, “메아스뭇” 등이 정부군에 투항.
1998.12.20 : “키우소페아” 및 “눈체아”등이 파일린에서 투항, “타목”이 고립됨.
1999. 3. 6 : “타목”이 정부군에 체포됨.

옷다 민체이 성의 안롱벵 마을

크메르 루지 최후의 날, 그 동안 많은 전투와 습격을 지휘하였으며 크메르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많은 테러를 자행하였던 백정이라는 별명까지 가진 흉폭한 외발 장군인 “타목”이 비무장인 채 국경을 조금 넘은 태국의 밀림 속에서 체포되었다.
크메르 루지의 사실상 마지막 지도자였던 호전적인 “타목”은 이 곳 안롱벵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1년 전부터 별 저항 없이 은둔하고있었다.
마지막까지 남아 크메르 루지군에 충성을 바쳤던 자들의 얘기는 “타목”이 결국에는 자신이 감옥에 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있었음에도 추종자들이 평화적으로 정부군에 투항하는 것을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타목”의 심복 부하들 중 “타목”을 체포하는데 협조하였던 자들의 말에 의하면 “타목” 자신은 구금이 되지 않을 것으로 믿었으며 사실은 사면 제의의 덫에 걸려들었다고도 한다.
그 동안 수십 년에 걸쳐 크메르의 문화를 말살하고, 이백 만이 넘는 국민들을 죽이고 캄보디아를 세계 중의 극 빈국으로 만들었던 이 크메르 루지 시대의 마지막 날로부터도 1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 곳 크메르 루지의 마지막 거점에서 감추어져 있던 비밀들이 들어 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지난 1997년에 “손센”과 그 가족들을 죽이는데 참가했고 또 “타목”의 지시를 받아 “폴폿”을 체포하였고, 마지막에 대규모 투항을 지휘하였으며 또 종국에는 “타목”의 체포에 앞장을 섰던 현지의 일부 주민들과 군인들은 다음과 같이 지난 숨겨진 일들을 말하고있다.

대규모 투항이 지휘체계를 분열

붕괴의 시작은 이곳 “폴폿”의 마지막 거점에 살던 자들이 북서쪽 파일린과 프놈말라이 지역에서 1996년에 대규모 투항을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보석과 목재가 풍부한 이 지역의 크메르 루지들이 정부에 투항을 함으로써 크메르 루지의 재정에 큰 타격을 주었고 특히 부수상을 지냈던 “이엥사리” (폴폿의 매형)까지 포함한 15,000명에 이르는 많은 숫자의 군인과 주민들이 투항하자 정신적인 충격과 사기 저하가 매우 컸었다.
그러나 프놈펜의 일부 정치 전문가들은 크메르 루지의 붕괴는 이미 거의 와해되어가고 있던 권력 구조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가 주원인인 것으로 보고있다.
1950년대 후반 크메르 루지의 캄보디아 공산주의 운동이 시작되고 나서 20여 년이 지난 뒤에 처음 몰락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즉 1978년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침공이 크메르 루지의 역사를 몰락의 길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가시적인 마지막 붕괴의 결정적인 시작은 사실 파일린과 프놈말라이 두 마을에서 시작되었는데 즉 1996년에 “손센”은 이 두 국경 무역 도시에 오토바이, 소, 트럭, 제재소까지 포함한 모든 사유재산을 크메르 루지 조직으로 소유권을 넘기라는 (국유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러한 지시가 있자 서쪽 국경 지방에서는 가장 큰 크메르 루지의 거점인 파일린과 북쪽 국경지대의 안롱벵 본부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였으며 파일린과 프놈말라이 마을에서는 본부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차게된다.
한때 크메르 루지군의 장군이었으며 “손센”의 직속이었고 서열 6위까지 오른바 있는 “께팍”은 2월에 가진 2번의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이 지시는 “폴폿”의 허락을 받지 않은 “손센” 자신의 결정이었다고 하나 안롱벵의 다른 크메르 루지 고급 장교들 및 프놈펜의 크메르 루지 전문가들은 “손센”이 항상 “폴폿”의 지시를 받고 행동하였다고 한다.
“께팍”의 얘기로는 처음에는 대부분의 크메르 루지 사람들이 이러한 파일린 측과의 긴장이 그 동안의 통제 체제와 상호관계로 보아 쉽게 해결될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당시 “폴폿”은 그의 추종자들 중 거두들인 “타목”, “손센” 그리고 “눈체아” 등을 파일린과 프놈말라이로 보내어 이 문제들을 협상, 해결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세 거두들은 협상에 실패하고 만다.

“께팍”에 의하면 호전적인 “타목”은 그 문제를 아예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강력하게 나감으로 해서 작은 문제를 더 크게 만들었다고 하며 크메르 루지 정권 당시 외무부 관리 출신의 “숭시콘”이라는 자도 “타목”이 프놈말라이 마을을 협상 차 방문하였을 때 “손센”의 지시만 옹호하였으며 사유재산의 국유화 고집만 부렸지 상호간 합의점을 찾으려고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재산 몰수 지시의 배경에 대하여 일부 크메르 루지 고급 장교들의 얘기는 파일린에 있던 “이엥사리”가 태국의 상인들에게 사기를 당하여 약 1천만 불의 크메르 루지 공금을 날리게 되자 “이엥사리”의 무능력과 실수에 대한 응징의 조치로 “손센”이 이러한 재산 몰수 지시를 내린 것이라 한다.
또 한편 1996년에 투항 한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 조치는 안롱벵에 고립되어있던 “폴폿‘휘하의 과격파들이 크메르 루지의 주 소득원이 되는 태국과의 국경 밀무역이 파일린과 말라이 지역에 편중되어 있는데 이곳의 지휘 통제가 허술해졌기 때문에 이를 다시 강력히 통제하기 위하여 내린 조치라고도 한다.
물론 파일린과 말라이 지역의 크메르 루지들이 안롱벵 쪽보다 훨씬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지막 분규는 결국 1996년 6월에 파일린 북쪽 80km 지점 태국 국경에 위치한 프놈말라이에서 가진 회의에서 발생하였는데 이 회의에는 “이엥사리”, “이친”( 전 크메르 루지 415사단장을 지냈고 현재 파일린 시장) 그리고 “타목”등이 참가하였다.
결국 이 회의에서 서로 의견이 충돌하여 “이엥사리”와 “이친”은 그해 8월에 450사단장인 “속펩”과 같이 크메르 루지 조직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중앙 정부와 막후 협상을 하여 한달 뒤인 9월에는 정식으로 투항, 프놈펜 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8월에 “이엥사리”의 이탈이 있자 안롱벵의 크메르 루지 방송은 파일린을 통솔하는 “이엥사리”가 1985-1991년 사이에 중국이 원조해준 수백만 불의 국고를 유용한 죄인으로 규정을 하고 또 반역자로도 규정하는 방송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이엥사리”는 그 자신의 치부를 위하여 나무를 벌목하였고 적인 프놈펜 정부에 동조하여 우리 지역인 파일린과 말라이 지역을 공격하게 만들었다“.
이 방송은 또 “한때 민주 캄푸치아의 중요한 위치에 있던 ”이엥사리“가 크메르 루지의 중추신경을 마비시키고 세계에 우리의 약점을 노출시켰다”고 비방하였다.
사실, “이엥사리”와 “폴폿”은 1950년대에 같이 파리에서 마르크스 레닌 공산주의를 공부하였던 처남 매부 지간으로 1956년 초부터 캄보디아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시작하였고 1975-1979년 사이의 “민주 캄푸치아” 시절에는 쌍벽을 이루는 두 거두들이었는데 종국에 서로 다른 길을 택하고 마는 운명이 되었던 것이다.

이탈이 발생하자 보복으로 그 즉시 전투가 발생하였다.
1996년 여름의 이탈이 있은 직후 “이엥사리”가 장악하고 있던 파일린 지역의 크메르 루지군 지휘관들은 동굴 속에서 회합을 가지고 “타목”이 그들의 지휘관인 “이친”을 죽이려한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이엥사리”의 아들이며 현재 파일린 시의 부시장인, 중국에서 헬리콥터 조종사 훈련을 받은 “이엥붓”은 회의에 모인 각급 지휘관들에게 “타목”이 파일린을 치고 우리들을 모두 처벌하려한다고 설명하였다.
당시 파일린 지역의 한 중대장을 맡고 있던 35세의 “훗보”의 말에 의하면 “타목”이 파일린을 치기 위해 야포 중대를 포함한 다른 지역의 군대를 이동시키기 시작하였고 또 파일린 근처 속칭 250구역에 지뢰를 매설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이친”은 모두에게 “타목”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우리 스스로 살길을 택할 것인가? 하고 묻게된다.
모인 자리에서 각급 지휘관들은 투표를 하여 결국 “타목”과 싸우기로 결정하였다.
그러자 대부분의 남은 군인들과 주민들도 모두 자기들의 재산과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타목”과 싸우기로 결심하였다.
“이친”은 군사의 반은 (투항 전이므로) 정부군의 공격을 대비하여 파일린 주변에 매복시키고 나머지 반을 이끌고 진두 지휘하여 타목의 군대와 싸우게 된다.
그러나 파일린과 프놈말라이 중간에 위치한 프놈다이 지역의 크메르 루지들은 그 곳의 지휘자인 “니콘‘이 ”손센“의 형제이었으므로 ”손센“과 ”타목“을 지지하였다.
“께팍”은 이때 1,000여명의 휘하 장병을 지휘하여 싸웠다고 하나 폴폿의 마지막까지 충성을 바쳤던 “뗍쿤날”이라는 자의 말로는 실지로는 250명 정도 밖에 안되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엥사리”와 “이친”을 따라 집과 가족을 지키려는 파일린의 군대에 대해 “니콘”의 군대는 전의도 약했지만 수 적으로도 열세이었다.
“이친”이 지휘하는 파일린 군대는 과거 베트남군과 정부군의 침공 시에 배후 도로를 차단하여 빼앗은 많은 탱크와 야포를 가지고 있었으며 보석과 고급 목재가 풍부하여 태국 상인들로부터 많은 탄약도 살수가 있었다.

1996년 11월 16일 파일린은 공식적으로 프놈펜 정부에 합세하게 되는데 20년에 걸쳐 힘겹게 크메르 루지와 싸워왔던 프놈펜 정부로는 뜻 있는 한순간이 되는 것이었다.
당시 훈센 제2수상도 엄중한 호위 아래 파일린을 방문하였고 축제는 수일간 계속되었다.
프놈다이 지역의 “니콘”도 결국 형제인 “손츔”과 타목의 사위인 “타뭇쓰”와 함께 그해 12월에 투항하게 되는데 이들은 1996년 10월에 파일린과의 전투 중 “이친”에게 붙잡혀 파일린에 감금되어 있다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캄보디아의 헌법을 준수하겠다는 서약을 하고서 투항을 할 수 있었다.
그 동안 한때 크메르 루지 장교였던 “훈센”을 배신자이며 베트남의 꼭두각시라고 비난하던 이들이 당시 집권 푼신팩 당의 라나릿드 제 1수상 보다 제 2수상인 훈센(CPP당)측을 통해 투항한 것은 앞으로의 세력 판도를 이미 예측했다고도 볼 수 있으며 또 그 분석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도 지금은 증명이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파일린의 투항으로 CPP당도 권력의 장악에 자신감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1998년 12월 마지막 투항 전까지 “타목”으로부터 가장 신임을 받은 크메르 루지군 장교였던 “껨템”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 전투의 와중에서 “타목”, “손센” 그리고 “눈체아” 등은 안롱벵의 본부를 떠나 태국에서 은거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태국에서 은거하고 있자 200km 쯤 떨어진 안롱벵에 남아있던 “폴폿”은 매우 화가 났다.
그는 이들을 엄하게 처벌해야만 되겠다고 마음먹고 호출을 하여 1996년 12월 15일에 이들을 안롱벵 본부로 불러 들였다.
“폴폿”은 이들 셋에게 파일린 지역과의 분규 문제를 해결하라고 지시했는데 오히려 문제가 더 커지고 내분이 확산되어 이탈과 함께 조직 내의 전투로까지 비화되어버리자 이들이 프놈펜 정부와 내통을 한 것으로까지 의심을 하게되었다.
결국 “타목”, “손센”, “눈체아” 등 세 사람은 “폴폿”의 지시에 의하여 자택 연금을 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크메르 루지 지도층 강경파 안에서도 반목의 시작이 되었고 사실 “폴폿”을 제외한 다른 모든 크메르 루지 지도급 인사들은 나름대로 프놈펜 정부와 비밀 대화 창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프놈펜 정부는 이들의 장래 이용가치를 조심스레 분석하고 있었고 또 크메르 루지 내부분열을 위해 상호 불신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었다고 프놈펜의 군 첩보 담당자는 말하였다.
즉 프놈펜 정부나 크메르 루지 지도층이나 모두가 나름대로 자신들의 장래와 이익을 위하여 막후 흥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크메르 루지 지도층 내에 조직 와해의 책임 소재 등을 두고 혼란이 생겼다.
결국에는 충격적인 “손센”의 처형이 이루어지고 그로 인하여 조직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상태로 완전히 분산되어 버린다.

당시의 일부 정보에 따르면 “타목”은 1996년 12월 “시엠립”공격을 지휘하였고 그 이후 정부측과의 평화협상에 가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정보는 최근 안롱벵에서 밝혀진 정보와는 일치되지 않고 있는데 즉, “께팍”이나 “껨템”등의 말에 의하면 1996년 후반에서 1997년 초까지 “타목”은 자택 연금을 당하고있었다는 것이다.
“타목”, “손센”, “눈체아” 등이 자택 연금을 당하고있었던 이 기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있다.
일부 군부에서는 그들이 1997년 6월까지도 엄중한 감시 하에 자택 연금 중에 있었다고 한다.
1997년 6월 9일, “폴폿”은 그의 비밀 심복인 “소사론”을 “눈체아” 및 “손센”의 집에 보내어 회의에 나오라고 전하였다.
이날이 바로 “폴폿”에게는 되돌릴 수 없는 비운의 사건이 발생하는 날이 되고 말았다.
“손센”을 회의에 데려오는 대신 “소사론”과 그의 부하들은 “손센”과 그의 처 “윤얏” 그리고 아이들을 포함한 전 가족을 집 앞에서 잔인하게 즉결 처형하여 버렸다.
“께팍”의 얘기로는 “폴폿”은 그저 그들과 만나 현안 문제들을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의논하려 했는데 평소 “손센”과 감정이 안 좋았던 “소사론”이 자기 임의로 “손센”을 처형해 버린것이라 한다.
“껨템”은 또 주장하기를 이 처형 사건을 “폴폿”은 반대 세력을 위축시킬 수 있는 본보기가 된 것으로 평가하여 확대하지 않고 조용히 무마시키려 했다고 한다.
즉 “폴폿”은 이미 파일린과 프놈말라이 지역의 배신을 경험하였고 또 그로 인해 프놈펜 정부측에 반대 세력들이 더 가까워진 것으로 분석하였기 때문이었다.

1997년 “타목”의 지휘아래 이루어진 “폴폿”의 인민재판에 서방의 기자 한 명이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크메르 루지 진영에 들어가 취재할 수 있게 되었다.
Nate Thayer라는 이 기자는 그래도 그 곳에서 많은 새로운 것을 볼 수 있었고 또 크메르 루지의 마지막 장면을 서방에 보도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이 기자의 목격에 의하면 이 인민재판에서 “폴폿”은 “손센”의 살인 혐의와 “타목” 및 “눈체아”등도 죽이려 했으며 또 강제로 구금했었다는 죄명을 다른 여러 가지 죄명과 함께 받았다.
또 1997년 2월 25일에 “폴폿”은 인민 집회를 열고 새로운 군 지휘부와 정치 지도부를 편성하여 “타목”을 (소사론 등을 위시한 심복들로) 대치하겠다고 공포하였다고 한다.
그 후 1997년 10월에 이 서방 기자는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폴폿”과 인터뷰를 하였다.
이때 “폴폿”은 “손센”의 처형은 자신이 직접 지시를 내렸다고 하였으며 30년 동지였던 “손센”이 자신을 배반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당시 “손센”의 처형을 외부에 알린 것은 그 당시 정부군의 참모총장이며 “푼신팩”당 소속 장군이었던 “닉분차이”였다.
“폴폿”의 호위병들이 “손센”의 집에 도착하자 “손센”은 저항을 하였으며 그 즉시 호위병들은 “손센“, ”손센“의 아내, 아이들, 식모, 손센의 호위병들을 모두 집 앞으로 끌어내어 사살하였다 라고 ”닉분차이 장군이 1997년 6월에 발표하였다.
(당시 닉분차이 장군은 푼신팩을 대표하여 크메르 루지의 키우삼판과 평화협상을 진행 중이었으며 한편, 또 다른 일부 조직은 CPP당 측과 평화협상을 진행 중이었다. 즉 크메르 루지 내에서는 한때 동맹군이었던 왕가 쪽인 푼신팩 당을 지지하여 평화협상을 하자는 파와 또 이제는 장래를 보아 실질 세력이 있는 훈센의 CPP당을 지지하여 협상을 하자는 파로 은밀히 나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크메르 루지 방송은 곧이어 “민주 캄푸치아를 이끌던 ”손센“과 문교부장관을 지냈던 아내 ”윤얏“이 공산 베트남 및 그 괴뢰(CPP당을 뜻함)들과 내통하였다” 라고 방송하였다.
“키우삼판”은 또 “공산 베트남과 훈센 괴뢰정부는 민주 캄푸치아 의회와 민주 캄푸치아에 의하여 해방된 지역을 분열시키기 위하여 ”손센“ 및 ”윤얏“과 그들의 테러리스트들을 내통시켰다”라고 방송을 하였다.
사실 크메르 루지 권력 지도부에서는 1992년 초부터 “손센”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폴폿”은 “손센”이 훈센의 측근들과 전화로 통화하는 것을 여러 차례 주의시켰다고도 한다.
또 Thayer 기자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손센”의 처형 직전 “폴폿"은 정부가 제시한 평화협정 조건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심한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Thayer 기자가 갔을 때는 이미 “타목”이 늙은 “폴폿”을 제치고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손센”의 처형이 “폴폿”에게는 지배력을 상실하게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프놈펜의 일부 관계자들의 말에 의하면 “손센”은 CPP당과 평화협정을 진행 중이었다고 하며 한편 “키우삼판”과 다른 파들은 “푼신팩”당과 그러한 접촉을 하고 있었다고도 한다.
1997년 7월의 푼신팩 당과 CPP 당간의 프놈펜 내전을 생각하면 캄보디아는 또 한번 푼신팩과 CPP 사이에 크메르 루지의 군사력을 업고 큰 내전을 치를 뻔했던 위험한 상황이었었다.

“손센”의 숙청 이유가 파일린과 말라이의 이탈 책임이나 배반자들에 대한 경고라고는 대다수의 크메르 루지들은 믿지 않고 있다.
크메르 루지의 대학살 조사를 하고있는 한 사람은 “손센”이 급작스레 처형된 이유는 그가 크메르 루지의 많은 학살 행위 등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특히 아내 “윤얏”은 문교부장관을 맡아 종교 말살 운동을 펴 일부 왕가 쪽 사람들과 많은 스님들을 처형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 이는 왕가 쪽에서 볼 때는 사면이나 용서를 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사실 그 당시 평화협정 운운한 것은 미사 어구에 지나지 않았고 이미 국제사회에서는 이들의 비인도적 범죄 행위를 국제 사법 심판에 회부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만약 “손센”이 살아서 진술을 하게 될 경우, 많은 고위층이 투옥 및 처형될 것이 뻔하였다.
어쨌든, 지도층의 상부에서는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즉, 지휘 통제가 고삐가 풀리기 시작한 것과 내부에 소요가 발생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껨템”은 만약 “손센”만 처형되었더라면 사실 큰 소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와 자식들과 손자들과 식모까지 죽였기 때문에 공포와 불안이 조성되고 증오가 발생되었다“ 라고 하였다.

사실 위협을 느낀 “타목”은 “손센”의 처형 전에 이미 스스로 자택 연금을 무시하고 나와 반 “폴폿”활동을 하고 돌아다녔다.
실지로 처음 2-3개월 정도는 집에 있었으나 그 후에는 경비들에게 누구를 만나러 간다고 하고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타목”은 소름이 끼칠 정도의 처형 현장 사진을 찍어 군중들에게 공개하면서 “폴폿”이 자기도 죽이려한다면서 군중들에게 불안과 공포심을 주고 반 “폴폿” 활동을 부추겼다.
그는 주민들, 동장들을 만나서 세력을 규합하려하며 “폴폿”이야말로 반동분자이며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선동하였으나 사실 사람들은 그가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폴폿”은 내분이 나면 조직이 와해되므로 타협을 하기로 하고 군대를 파일린에 보내지 말라고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 속에서 “타목”은 오랜 지도자였던 “폴폿”을 누르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타목”이 주민들을 잘 포섭하였기 때문에 군인들의 대다수가 그를 따르기로 했다고도 한다.
“손센”의 처형은 곧바로 내분을 발생시켜 안롱벵 시내에서 2-3일간 산발적인 총격전이 있었다.
“타목”측과 시가전이 발생하자 이미 전투력을 상실한 “폴폿”은 “키우삼판”, “짠유란”, “목벤”, “까오분행”, “인소팹” 등 고위 측근들과 추종자 주민들과 안롱벵을 떠나 북쪽 태국 국경 “동렉”산맥 밀림 속으로 피하였다.
“소사론”을 위시한 “폴폿”의 심복들과 “타목”의 군대 사이에 무력 충돌이 수일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소사론”의 가족이 “타목”에게 인질로 붙잡히고 “타목”은 “폴폿”의 추종자들에게 항복을 권유하자 무력 충돌이 일시 중지되었다.
곧바로 “타목”의 군대는 “눈체아”, “막벤”, “까오분행”등을 포로로 붙잡아 구금을 하고 계속 “폴폿”을 추적하였다.
“폴폿”과 “키우삼판”은 자신들이 드디어 고립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망명하기로 결심을 한다.
그 당시 루머에는 “키우삼판”이 “폴폿”에게 인질로 끌려갔다고도 하는데 사실은 스스로 따른 것이라고 한다.

폴폿의 최후

“폴폿”을 체포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타목”의 심복인 “껨템”이었다.
“폴폿”과 “키우삼판” 그리고 5명의 호위병들은 5개의 가방에 약 5백만 불 정도의 돈을 싸서 들고 갔으며 또 다른 5개의 가방에도 5백만 불 정도를 넣어 은밀한 곳에 미리 감추어 두고 갔다고 한다.
“폴폿”과 “키우삼판”은 제 3국으로 망명하려 했다. 그 당시 잘못된 보도에는 “타목”과 “눈체아‘도 망명했다는 보도도 널리 퍼져있었다.
“폴폿”과 “키우삼판”은 태국 국경의 유명한 “쯔록쫌”고개 (흔히 촘총 Pass라고 부름) 동쪽 10km 쯤 되는 곳에 있는 “끄발안솜“이라는 마을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쫓기어 밀림 속 동굴로 피하였다.
피난 인원은 “폴폿”, “키우삼판”, 폴폿의 처, 딸, 그리고 5명의 호위병들이었다.
돈이 든 5개의 중국제 가방은 매우 무거웠고 호위병 중 4명은 드디어 돈에 탐을 내어 “폴폿”을 배신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호위병들은 몰래 추격대의 무전을 도청하고는 “폴폿”에게 추격대가 가까이 왔으니 이쪽으로 가야합니다“라고 거짓 보고를 하였다.

4명의 호위병들은 결국 4개의 돈 가방을 가지고 도망을 하였다.
그리고는 인근에 있던 동맹군에 합류를 하였는데 그 동맹군이란 내전으로 CPP당 군대와 싸우고 있던 당시 푼신팩 당 소속 “칸 사본” 장군 휘하의 정부군 4사단이었다.
이 4사단은 수주일 뒤에 CPP 소속 군대에 밀려 “닉분차이”장군 (당시 푼신팩 소속의 국군 참모총장이었고 지금 상원 부의장)과 프놈펜에서 탈출한 푼신팩 당원들과 같이 태국 국경지대에 고립되어 버린다.
“껨템”은 4명의 “폴폿” 호위병들이 그 돈을 “닉분차이” 장군에게 주었다고 주장하나 "닉분차이‘ 장군은 들어본 일도 없다고 하며 부인하였다.
당시 “쁘롬수”(닉분차이 장군의 친척, 푼신팩 군과 같이 동맹하여 크메르 루지군을 지휘, CPP 군을 상대로 싸움)는 “칸사본”(정부군 참모차장, 푼신팩 군을 지휘, 북쪽 태국 국경 마을 “오스막”에서 CPP 군과 싸움)에게 “4명의 폴폿 호위병들이 중요한 것을 갖고 왔다”고 얘기했지만 “칸사본”은 만나주지않았다고 한다.
“칸사본”은 나는 “쁘롬수”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그들이 거짓으로 나를 교란시키려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크메르 루지 반군과는 연관을 갖고 싶지 않아서 이를 묵살해 버렸다.“ 라고 말하였다.
당시 푼신팩 군대와 CPP 군대는 이미 바탐방 지역에서 수일간 교전을 하고있었다.
그리고 프놈펜에서는 푼신팩, CPP 두 정당간에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고있었다.
두 정당 모두가 크메르 루지군들을 자기편으로 투항시키어 전력을 증강시키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칸사본”은 나중에 이 4명이 다른 동료들과 함께 파일린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돈 얘기는 각설하고, “폴폿”과 “키우삼판”의 옆에는 인제 “응엣”이라는 호위병 1명만 남았으며 돈도 25,000불만 남아 있었다.
“폴폿”은 “응엣”을 태국으로 보내 음식을 사오고 또 아는 사람들에게 협조를 요청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이미 예측을 하고있던 “타목”은 태국 국경 수비대에 귀 뜀을 해주었다.
크메르 루지의 자원과 권력을 검어 쥐게된 “타목”은 사실 그 지역을 제압하고 있었고 태국 국경지대의 관리들과는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태국 국경 수비대는 감시를 늘렸고 “응엣”은 국경을 넘자말자 잡혀 버렸다.
“껨템”이 국경으로 가서 “응엣”의 신병을 인수하여왔고 “응엣”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폴폿”의 은신처를 알려주었으며 그 즉시 “타목”은 “응엣”과 “소사론”을 앞장세우고 200명의 군대를 보내어 두 거두들을 잡아왔다.
체포 현장에서 “껨템”은 몇 미터 뒤 랜드크루저 차안에서 두 거두들의 체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다.
“께창”의 얘기에 따르면 체포 당시에 “키우삼판”은 일어서서 두 자루의 권총을 들고 하나는 “폴폿”을 겨누고 하나는 자신을 겨누며 군인들이 더 가까이 오면 둘 다 자살하겠다고 하였으며 군인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폴폿”하고는 영어로 얘기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키우삼판“은 자기의 사돈(딸의 시아버지로 ”타목“의 심복)하고만 얘기하겠다고 하였다 한다.
이러한 “께창”의 진술에 대해 크메르 루지 전문가들은 온건한 성격의 “키우삼판”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고도 한다.
“께창”은 우발적인 사격으로 살상을 입는 것을 막기 위하여 현장의 군인들에게 이들이 이미 비무장이며 안롱벵으로 송환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소사론”과 “응엣”도 숲 속에 있다가 나타났다.
“께창”에 의하면 군인들은 오는 길에 숲 속에서 “폴폿”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타목”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오랜 지도자였던 두 사람이 초라한 몰골에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하자 군인들 중에는 울음을 터뜨리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폴폿”의 요리사였던 “눈냉운”도 군인들이 비록 “타목”의 지시가 있었지만 이들을 사살하는 것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안롱벵 마을에서도 일부 주민들은 “폴폿”과 “키우삼판”을 죽이지 말라고 꿇어앉아 “타목”에게 빌기도 했다한다.

“껨템”은 이 “께창”의 현장 상황 진술에 대해 처음에 그 현장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으므로 “키우삼판”이 “폴폿”을 겨냥했는지는 정확히 보지 못했고 단지 한 자루의 권총이 “키우삼판” 손에 들려있는 것만 보았다고 한다.
처음 숲 속에서 “응엣”과 “소사론”이 나타나자 “폴폿”과 “키우삼판”은 매우 반가워했다.
그러나 곧이어 군인들과 “껨템”이 나타나자 대단히 놀랐다고 한다.
“껨템”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제발 같이 안롱벵으로 돌아가십시다”라고 정중히 얘기하여 이들을 안심시키고는 “폴폿”을 “껨템”과 같은 차에 타게 하고 “키우삼판”은 다른 차를 타게 했다.
“폴폿”은 안롱벵에 도착하자 구금되어 체포 현장에서 멀지 않은 집에 가택 연금 상태로 있게되고 “폴폿”에 대한 인민재판 준비가 진행되었다.
인민재판에서는 서방 기자 Thayer가 참석을 할 수 있었고 “폴폿”은 배반자의 죄를 받는다.

“폴폿”은 1998년 4월 15일 갑작스레 사망하였는데 크메르 루지 관리들은 심장마비라고 하였다.
그러나 시체는 사인 규명을 위한 해부 없이 좋은 나무도 풍부한데도 폐타이어 더미 위에 놓고 화장해 버렸다.
“께팍”, “껨템” 그리고 파일린의 고위층에서는 “폴폿”이 심장병이 있어 주기적으로 산소를 투입하고 있었는데 “타목”이 산소 공급을 중단 시켜 버려 죽게되었다고 얘기하며 일부는 독살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고도 한다.
“폴폿”을 체포하고 나서 “타목”은 크메르 루지의 지도자가 된 것 같았지만 그 순간은 극히 짧았고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크메르 루지 몰락의 마지막 장의 단역을 맡았던 그는 지금은 프놈펜의 헌병대 감옥에 구금되어 국제 사법 심판의 재판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프놈펜을 긴장시킨 크메르 루지의 투항 정책

안롱벵에서 크메르 루지의 지도층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때에 프놈펜에서는 또 정부 여당 내에서 연립정부를 구성한 CPP당과 푼신팩당 간에 서로 싸움이 벌어졌었다.
파일린과 프놈말라이 지역의 크메르 루지가 정부에 투항하고 정부군에 편입 되어버린 일은 그로부터 수개월 사이에 풀 수 없는 사건들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믿기 어려운 “손센”의 갑작스런 처형과 “폴폿”의 구금 사실은 프놈펜에서 CPP 당과 푼신팩 당간의 싸움의 큰 이유가 되기도 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사실 오늘날까지도 CPP와 막후 접촉 중이던 “손센”이 왜 갑자기, 또 정말로 죽었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닉분차이” 장군이 “손센”이 1997년 6월 10일 죽었다고 발표하였는데 이 사건은 “푼신팩”당이 크메르 루지의 “키우삼판”과 평화협상이 거의 끝났다고 발표한 바로 그 며칠 후에 발생했던 것이다.
평화협상의 가능성이 보이자 과거 1975-1979 사이 “민주 캄푸치아” 시절의 잔학했던 범죄 행위에 대한 크메르 루지 지도급 여러 명에 대한 사법 심판 가능성의 공포가 다시 살아나게 된다.
그리고 “손센”의 처형 하루 전날, 시아누크 국왕은 “폴폿”과 “타목”은 국왕의 사면 대상에서는 제외되며 그 외 크메르 루지의 고위층은 당시 제1 및 제 2 수상의 요청이 있어야 사면할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
크메르 루지의 학살 행위를 조사하고있는 단체에서는 말하기를 “손센”은 당시 공산당 당중앙위원회 고위층들과 같이 학살 행위에 가장 깊이 개입되어있다고 한다.
학살 조사자들은 또 “폴폿”이나 “타목”같은 크메르 루지 지도층들이 100만 이상의 사람들을 학살하는 정책을 집행한 확고한 증거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손센”의 범죄 행위는 크메르 루지 범죄의 서류상 수사 과정에서도 명백히 밝혀졌다고 정부 문서 보관 본부의 “욕창”씨는 말한다.
“툴스랭” 감옥 (또는 S-21 보안대)- 적어도 2만여 명이 고문당하고 처형된-에서 발견된 서류에는 항상 “손센”이 체포 및 처형을 그의 집무실에서 결제, 서명하였는데 그 당시 “손센”은 국가 보안 담당이었다.
“손센”은 다른 지도층 인사들과 깊은 관련이 있었으며 만약 그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될 경우 그는 아마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모든 사람들을 연루시켰을 것이다”라고 “욕창”씨가 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안롱벵의 크메르 루지 간부들은 “손센”의 죽음은 프놈펜 정부의 정책과는 아무 관련도 없고 또 전범 사법 심판과도 별 관계가 없이 발생한 우발적인 것이다“ 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프놈펜에서 발생한 정치적인 분쟁은 사실 크메르 루지 조직 내부에 아주 심각한 영향을 끼쳤는데,
첫째; 정부군과 전투를 재개함으로써 1993년 서명한 파리 평화협정을 스스로 위반해 버린 크메르 루지는 내부 조직에 반전파와 전쟁파로 나누어졌다.
둘째; 이엥사리는 반전파로 전쟁의 재개를 반대하여 그 때부터 실권에서 쫓겨났다.
셋째; 정부측과 내통하는 자들을 고발하자는 측과 그러나 과거 크메르 루지에 충성스런 자들이었으므로 관대히 생각하여 묵인하여야 한다는 측으로 내부분열이 뚜렷이 나타났다.

“폴폿”과 “키우삼판”이 “타목”과 그 군대를 피해 피신하기 수일 전에 “닉분차이” 장군은 “키우삼판”을 크메르 루지 측의 평화협상 대표로 공포하였다.
그 때에서부터 약 1주일 정도의 기간 중에 “폴폿”은 평화협상을 반대하는 것으로 발표가 되었었다.
그리고 “폴폿”이 피신한 직후 “닉분차이”장군은 안롱벵의 크메르 루지군 95%는 중앙 정부를 지지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께팍”, “껨템” 및 그 외 당시 안롱벵에 있었던 크메르 루지 고위층들은 “폴폿”은 “타목”과 싸우고 있던 당시 군대를 재편성 중에 있었고 평화협상을 반대한 것은 “타목”이었다고 한다.
“닉분차이”장군에게 문의한 결과 그는 크메르 루지의 마지막에 대한 얘기는 정치적으로 너무 예민한 사안이라 말하고싶지 않다고 하였다.
“껨템”의 진술에 의하면 “닉분차이”장군과 “키우삼판”,“타목”등은 전쟁 중지의 마지막 계획안을 수립하고 1997년 7월 5일 쁘리아 비히르 사원에서 평화협정 체결 서명식을 할 계획이었다고 하나 “닉분차이”는 이를 부인하였다.
1998년 5월에 참모차장이며 CPP 당중앙위원인 “폴사룬”장군은 1997년 7월 3일 발발한 CPP와 푼신팩간의 내전에 앞서 “닉분차이”와 “라나릿드”왕자가 크메르 루지와 비밀 흥정을 끝내고 투항 협정을 맺은 사실을 고발하였다.
Thayer 기자의 기사에서는 정부를 대표하는 “닉분차이”장군과 크메르 루지를 대표하는 “키우삼판”이 7월 4일 태국 국경에 있는 쁘리아 비히르 사원에서 정치 및 군사 협력에 대한 상호 협정에 서명을 하였다고 쓰고 있다.
오랫동안 서로 대립을 하고있던 CPP당과 푼신팩당은 크메르 루지의 투항을 서로 자기편으로 유도하여 세력을 확장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8년에 CPP의 “폴사룬”장군은 또 이들이 1996년 파일린에서 가진 회합에서 “정부(CPP를 일컬음)에는 ”윤“(베트남을 낮추어 부르는 말)의 심복들과 꼭두각시들이 많다”고 한 사실을 명예훼손 등으로 제소하기도 하였다.

제 1수상 “라나릿드” 왕자가 이끄는 푼신팩 당이 “안롱벵의 4천명의 강력한 크메르 루지 군대와 곧 협상이 이루어질 순간이다”라고 발표를 하자 당시 제 2수상으로 있던 “훈센” 수상은 위협을 느끼게 된다.
그는 곧 그 협상은 불법이니 즉각 중지하라고 푼신팩 당에 경고 및 요구를 하였다.
당시 “훈센” 제 2수상은 “누군가가 크메르 루지와 합세하여 국가를 전복하려하고 있음을 밝히고 이를 엄중히 경고한다”고 1997년 6월 16일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푼신팩 당은 제 2수상인 나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크메르 루지의 대통령이었던 ”키우삼판“을 택할 것인가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CPP 당과 푼신팩 당간에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1997년 2월에 바탐방에서 있었던 양당간의 총격전에 이어서 이번에는 1997년 6월 17일 프놈펜 시내 한복판인 노로돔 가에서 경찰청장인 CPP 소속 “혹룬디”의 호위병들과 푼신팩 당의 호위병들 간에 총격전이 발생하였다.
수주간을 버티며 쌍방은 서로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었는데 푼신팩의 “라나릿드” 왕자는 “키우삼판”에게 정당결성권까지 인정하려하였고 CPP의 “훈센” 제 2수상은 크메르 루지의 무조건항복을 요구하였다.
1997년 7월 4일 프놈펜 시내에서 드디어 양당간에 전면 전투가 발발하자 군사적으로 우세한 CPP 당은 푼신팩군 및 당원들을 국경지대로 몰아 부쳤으며 푼신팩군은 그들에게 투항한 일부 크메르 루지군과 합세하여 CPP 군에게 대항하여 캄보디아는 수개월의 또 다른 내전을 치르게 된다.
크메르 루지의 입장에서 볼 때 이 CPP와 푼신팩간의 전쟁은 자기들의 원하던 평화협상의 조건들이 원천적으로 무산될 수 있는 위험도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1996년 정부에 투항했던 “삼롯”지방의 크메르 루지들은 지휘관 “임판”을 선두로 푼신팩 쪽으로 가담을 하여 국경에서 CPP 군을 상대로 싸웠다.
그러나 CPP 군은 프놈펜에서 푼신팩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전국을 거의 장악해 버린다.
그 동안 프놈펜에서 거론되어 왔던 크메르 루지와의 평화협상은 아예 묵살되어 버렸다.
그리고 “타목”은 계속 크메르 루지 잔당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타목의 독선이 대규모 이탈을 자초

멀리 고립되어 있는 안롱벵에서는 다시 긴장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크메르 루지의 통치권을 검어 쥔 “타목”은 주민들을 모아놓고 “이제 검은 구름은 걷혔다. 미국도 잡지 못한 ”폴폿“을 안롱벵의 우리가 잡았다”라고 부추겼다.
평화는 목전에 다가왔다고 하면서도 그는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해 주민들을 억압하기 시작하였다.
“께팍”은 한때 “타목”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는데 1989년 위치가 격하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손센”이 질이 나쁜 군복을 보급하였다고 대중 앞에서 불평하기 시작한 때부터라고 한다.
다른 이들은 그가 평소에 왕을 존경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다른 지휘관들은 그의 오랜 경력을 보아 그를 존경하고 있었으며 대다수 안롱벵 사람들은 능력있는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조심스럽게 갈망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1998년, 안롱벵에서는 금연 명령이 내리고 음악은 혁명가만 틀게 하며 여자는 화장을 못하게 하였다.
인간이 생명의 위협과 공포 속에 오랫동안 살게되면 자연히 저항으로 비화하게 된다.
투항하는 사람들은 “우리는 정말 짐승같이 살았었다”라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안롱벵에서 새로이 발생한 가혹한 상황은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갈구하는 분위기로 바뀌어 갔으며 프놈펜에서 CPP가 푼신팩을 강하게 밀어붙여 더 일층 빨리 종전이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였다.
“께팍”은 마침 정부군에 편입한 파일린 지역에 형뻘 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형뻘 되는 사람은 “훈센”수상의 당시 상급 군사 고문관인 “몰렙”장군의 휘하에서 첩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한다.
“몰렙”장군은 그 이후 국군 정보 참모장을 맡았다.
“께팍”은 그를 따르는 지휘관들과 같이 일단의 행동을 같이하기로 약속하고 “몰렙”장군의 첩보원인 예의 그 “형”과 밀림에서 비밀 모임을 가졌다. (몰렙 장군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고 한다).
어쨌든, “께팍”은 그의 휘하 지휘관들과 한마음이 되어 1998년 3월 23일 수천 명의 크메르 루지군을 모아서 투항을 하게되며 대신 “타목”은 몇몇 심복과 인질로 “폴폿”을 데리고 밀림으로 도망을 간다.
그 이후에도 투항은 계속되었다.
“눈체아”와 “키우삼판”은 12월에 투항을 하고 “껨템”과 다른 5명의 상급 지휘관 - “껨눈”, “껨껫”, “눈놉”, “메아스뭇” 그리고 “임판” - 들도 3주전에 모두 투항을 하였다.
크메르 루지 지도급의 투항 계획은 이미 그 길이 준비되어 있었고 방법이 나와 있었지만 순조롭지는 못하였다.
수천 명의 크메르 루지군들이 투항 시에 태국의 국경 근처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단체로 파일린 등으로 이동한 것을 보면 그 동안 크메르 루지와 태국의 국경지대 관리들이 얼마나 친밀한 사이였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타목의 체포 - 마지막 장

전 크메르 루지 980사단장이었고 현재 정부군 23사단장인 “임뺌”과 그의 참모 “눈치런”이 “타목”의 체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 둘은 1998년 3월에 “께팍”과 같이 투항을 하였다.
이 둘은 당시 “껨템”과 “타목”의 심복이었던 “켐눈”과 “눈놉”등 3명과 같이 또 정부군 참모차장급인 “체아 사란”을 대동하고 “타목”과의 만남을 주선하여 정부군과의 모임을 유도하기로 하였다.
“타목”과의 만남이 준비되어 태국 쪽의 “총상굼”마을에 도착하자 “타목”은 그 때 손자들과 같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임뺌”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타목”을 만나자 우리는 건강 얘기를 먼저하고 조금은 멋 적어서 잠시 그냥 있었다.
그는 조금도 화를 내거나 다른 어떤 분위기가 없었다. 우리가 이미 그의 곁을 떠나 정부측에 투항을 했는데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잠시 동안 잡담을 주고받은 뒤에 안롱벵에 가서 정부측 대표들을 만나보라고 하며 “타목”을 초청하였다.
그 때 그는 매우 걱정스런 표정을 하였으나 곧 우리가 가지고 간 3대의 차에 분승을 하고 10명이 넘는 정부군들과 같이 곧바로 안롱벵으로 달렸다.
이 초청은 분명 함정이었으며 “타목”이 비록 그것을 알았더라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안롱벵에는 헬기가 기다리고 있었고 조종사는 “타목“이 보이자 바로 프놈펜으로 무전 연락을 하였다.
“타목”은 프놈펜에 도착하자 말자 헌병대에 구금되었다.
당시 태국군들도 “타목”을 잡으려고 하였으므로 “타목”은 국경에서 더 갈곳도 없었으며 비록 캄보디아 쪽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지만 태국군보다는 캄보디아를 선택한 것 같다.
사실 “타목”이 태국 진영에서 체포되어 왔지만 태국 대사관은 이 부분에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또 태국 측에서 어느 정도의 협조를 - 크메르 루지 쪽이든, 캄보디아 정부 쪽이든 - 했는지도 일절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타목”의 체포 2개월 전에 이미 투항을 했던 “껨템”의 얘기는 또 다른 내용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께팍”과 “임판나”가 이끄는 군대와 우리(타목, 눈놉과 껨템)군대 간에 교전이 있었으며 그 이후 우리는 위치를 이동하였다.
우리는 그 때까지 상당수의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교전이 끝나고 나중에 나는 정부측과 협상을 시작하였는데 그때 정부군 측은 나를 프놈펜으로 데리고 갔다.
프놈펜에서 나는 “몰렙”장군, 참모차장인 “메아소피아” 그리고 보병 사단장인 “체아사란” 등을 만났다.
나는 그들을 만나서 합의를 하였는데 우리를 정부군으로 받아주고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것 등이었다.
“타목”에 대해서는 그들은 “타목”을 인수하면 안롱벵의 조용한 곳에 구금을 할 것이며 “키우삼판”, “이엥사리”, “눈체아”처럼 마음대로 돌아다닐 자유는 주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후 나는 안롱벵으로 돌아가 “타목”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였는데 “타목”은 “내가 아직도 저항을 한다면 전쟁은 계속될 것이고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는 인민들에게 득이 되는 일이면 하라고 하며 비록 내가 투옥되거나 처형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인민들이 안전하게,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이라면 그 길을 선택하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껨템”은 태국 국경 수비대의 협조를 받아 “타목”과 그 동행자들을 데리고 촘총고개를 넘어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타목”은 바로 정부군 11사단 “위소펩”장군이 신병을 인수하였다.
나중에 정부측은 “타목”을 군 작전을 통하여 체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 동안 전 세계를 시끄럽게 하고 한 때 인도지나 반도에서 태국보다도 부국이었으며 1968년에 아시아 올림픽을 치를 정도로 수준 높았던 자기들의 조국 캄보디아를 세계 속의 빈국으로 만들고 또 많은 지식인들을 처형 해 버려 장래를 위한 앞으로의 청소년 교육까지도 망쳐버린 “민주 캄푸치아” - 크메르 루지(붉은 크메르) - 는 이렇게 허무하게 마지막을 한 흉폭한 자의 손에서 끝을 내었다.
이제 “타목”은 과거 그들이 잔학하게 고문하고 처형을 하였던 툴스랭 고문 박물관 근처 헌병대 감옥에 갇히어 국제 사법 심판의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