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1975년 5월 15일의 약 14시간 동안에 이 섬은 “포드”미국 대통령의 소위 “강력한 응징”의 명령을 받은 미 해병들과 섬을
지키던 크메르 루지군들이 격렬한 전투를 치렀으며 섬은 총성과 폭발음으로 뒤덮였었다.
모든 전쟁에서 다 그렇겠지만 죽은 자들에게는 전투 자체가 참 허무한 것이다.
사실 마야구에즈호의 선원들은 5월 14일 오전 11시 반에 크메르 루지로부터 석방되어 미국 구축함에 인수가 되었었다.
최근에야 공개된 당시 “헨리 키신저”국무장관이 “포드”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 “마야구에즈호의 선장 및 선원들의 재 진술서”에는
선원들이 무사히 풀려난 다음날 아침 10시 반에 미 해병의 첫 번 공격대가 코탕섬에 착륙하였다고 밝혀져 있다.
비록 섬을 공격하기 전에 이미 선원들이 풀려났었지만 “키신저”장관의 보고서에는 납치된 이후 수일 동안 선원들의 공포가 어떠했는가하는
새로운 내용이 있다.
선장은 풀려난 뒤 싱가폴에서 가진 기자 회견에서 “나는 선원들과 같이 안전하게 석방될 수 있도록 미국 정부의 적절한 대응을 요청한다는
것을 메스콤을 통해 발표하기로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기관장의 말은 “미군 지휘관들은 우리가 코탕섬에 억류되어 있지 않았고 미군의 공격 이전에 이미 안전하게 풀려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미국이 인도지나 반도 전쟁에 처음 참가했을 때와 같이 이 마지막 전투도 결국 상황 분석의 실패, 판단력의 부족 그리고 작전의
실패로 끝나 버린것이다.
1975년 9월 당시 “민주 캄푸치아”의 외무장관이었던 “이엥사리”는 미국 뉴욕에서 가진 해명 기자 회견 석상에서 “이 마야구에즈호
사건은 싸워야 했을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라고 하였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사이공 함락 수주일 후, 월맹의 지도자들은 당시 동맹 관계에 있던 민주 캄푸치아(크메르 루지)정부에 국경
문제로 회의를 갖자는 제안을 하였다 한다.
베트남은 역사이래 항상 캄보디아 땅을 탐내고 있었기 때문에 크메르 루지들은 이를 경계하여 1975년 5월부터 외국 선박 (사실은
주로 베트남 어선을 겨냥한 것)의 자국 영해 내 항해 금지를 발표하였다.
(폴폿이 서둘러 사이공 함락 17일 전에 프놈펜 함락을 하게된 것도 사이공 함락 후 월맹이 캄보디아 론놀 정권을 공격, 침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견제한 전략이었다)
컨테이너 피더선인 마야구에즈호는 당시 비 전투용 군수물자를 싣고 태국에 있는 미군 기지를 향해 공산화된 베트남 남부 해안을
멀리 돌아 막 캄보디아 해안을 따라 항해하고 있었다.
1975년 5월 12일 크메르 루지군의 경비정이 이 선박을 보고 접근하여 정선을 시켰다.
당시 크메르 루지군은 해안에서 53마일(96km) 떨어져 항해하는 마야구에즈호를 영해 침범으로 주장하였다.
2시 21분에 선박은 기관을 정지하고 구난신호를 보냈다.
경비정의 크메르 루지군들은 마야구에즈호의 선장에게 시아누크빌 항구로 입항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선장은 레이다가 고장이 나서 항구로 접근할 수 없다고 하고 입항을 거부하자 경비정은 닻을 내리게 하고 약 1시간 정도
지체한 후 선박을 코탕섬으로 향하게 한다.
현재 콤퐁스푸 성의 쁘렉께 마을 촌장으로 있는 당시의 크메르 루지 소대장 “마오린”은 “그 배는 우리 영해 내에 불법으로 진입하였으므로
우리는 당연히 정선 및 나포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배에서 미군이나 또 다른 수상한 것은 찾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마야구에즈호는 코탕섬 해역에 닻을 내리고 전 선원들은 인근을 지나던 태국 어선에 실려 5월 13일 저녁 7시경에 시아누크빌 항구에
도착하였다.
(크메르 루지와 태국의 국경지대 마을들은 무기 공급, 국경 무역 등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이어서 당시에도 태국 어선들은 캄보디아
영해에 자유로이 출입하였던 것 같다)
마야구에즈호 납치 사건이 전해지자 당시 “포드”미국 대통령은 3척의 군함을 즉각 피랍 현장에 급파시켰고 또 태국의 미군 기지에서는
천명 이상의 해병들이 작전을 위해 비상대기에 들어갔다.
미 해군 함정들은 최루탄과 위협사격 등으로 시아누크빌 항구로 향하는 예의 이 태국 어선을 정선시키려 했으나 크메르 루지군이 동승을
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이 어선은 시아누크빌 항구로 입항해 버렸다.
크메르 루지의 지도급 인사들은 “미국의 소리” 방송 (VOA)에서 마야구에즈 납치 사실을 방송할 때까지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나중에 뉴욕에서 가진 기자 회견에서 “이엥사리”는 “우리의 통신 체제는 미국의 소리 방송보다도 훨씬 더 늦기 때문에
프놈펜의 지휘부는 전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라고 진술하였다.
나중에 시아누크빌의 크메르 루지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 받자 프놈펜의 지도자들은 즉각 선박을 풀어주라고 지시를 하였는데 이는 당시
프놈펜 함락 2주정도 밖에 안되어 아직 론놀 정권의 패잔병 소탕과 치안 유지에 정신이 없는 크메르 루지의 입장에서 미국 정부와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엥사리”는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러나 우리가 선박을 풀어주라고 지시하는 그 때에 미군은 코탕섬에 엄청난 폭격을 감행하고 있어서 정말 그 섬에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 고 덪 붙였다.
최초의 피해는 5월 13일 23명의 공군을 싣고 태국 쪽으로 향하던 헬기가 추락하여 23명 전원이 몰사한 사건이었다.
5월 14일 아침 6시 30분 마야구에즈호 선원들은 백기를 단 태국 어선에 태워져 공해로 나갔다.
5시간 후에 공해 상에서 미 구축함 “윌슨”을 조우하여 선원 전원은 무사히 구조되었는데 구축함 “윌슨”에서는 이 선원들을 구하려고
미 해병들이 코탕섬을 공격하고 있는 줄 알고있었다.
“키신저”장관의 보고서에도 “이 선원들은 해병들이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또 공격을 결심하기 이전에 이미 석방이 되었었다”고
하였다.
5월 15일 아침, 170명 이상의 미 해병이 8대의 헬기에 나누어 타고 코탕섬을 향하였다.
그들은 섬에 고작 30 - 40명 정도의 크메르 루지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작전에 참가했던 한 해병의 얘기는 적어도 150
- 200명은 되었었다고 한다.
그리고 착륙 전에 벌써 3대의 헬기가 피격, 추락하여 버렸다.
그러나 “마오린”은 초기의 미군 정보가 맞습니다. 처음 미군이 공격을 해 올 때 나는 40명의 소대원들을 잠복시켰습니다. 미군들은
닻을 내리고 있는 마야구에즈호 주변과 섬에 폭격을 시작하였는데 나는 이런 대규모의 전투가 이 섬에서 벌어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며
전세는 미군들이 석권하고 있었으며 우리들은 너무 놀랬습니다. 내가 미군들과 싸운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당시 헬기 추락에서 살아남은 미 해병 “래리 바넷”은 그 당시 상황을 “내가 탄 헬기의 꼬리 부분이 적탄에 맞자 나는 죽는구나하고
생각했다. 우리 뒤에 따라오던 헬기는 하나의 큰 불 덩어리가 되어 폭발해 버렸다. 그러자 우리 헬기의 꼬리가 뚝 떨어져나가 버렸다.
나는 죽음에서 깨어나길 빌며 눈을 꼭 감았다” 라고 설명한다.
“바넷” 해병은 또 “공격 전에 우리들은 아주 빈약한 브리핑을 받았으며 그것이 결국 동료들과 친구들의 생명을 앗아가 버렸다.
브리핑에서는 그저 몇 명의 저격수 정도만 있을 것이라고 했다. 코탕섬으로 비행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생각은 이 작전이 지휘관들의 판단처럼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들이었다. 나는 이 작전이 분명한 큰 실수였다고 믿는다”
라고하며 울분을 토하였다.
당시 분대장이었던 “헌터”는 또 “우리는 아예 작전 브리핑을 받지도 않았고 그저 평상시처럼 개인 화기를 들고 작전 지역에 도착하여
그 때부터 알아서 상황을 판단, 임무 수행하는 것으로 알았다. 나는 그저 내가 훈련받은 데로 임무를 수행하였고 단지 우리 분대원
아무도 사상자가 나지 않기를 기도할 따름이었다” 라고 하였다.
비록 불시의 기습이었지만 크메르 루지군들은 그 즉시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하였다.
“미군이 착륙하자 우리는 이들에게 반격을 하였으며 우리 병사들은 잘 은폐하여 미군에게 대항하였다”라고 뉴욕에서 가진 회견에서
“이엥사리” 외무장관이 덧붙였다.
작전 개시 후 14시간만에 미군들에게 철수 명령이 하달되었다.
전투기들이 엄호 사격을 하고 어두움과 적탄을 피해가며 병력 철수를 위해 헬기들이 착륙하기 시작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미 해병은 15명이 전사하고 다른 수명이 부상하였다.
미군의 보고에는 55명 이상의 크메르 루지군들이 사살되었다고 하나 “마오린”은 6명의 크메르 루지만 전사하였다고 한다.
숫자 미상의 민간인들이 미군의 “시아누크빌 항구 폭격과 인근 ”림“해군기지 폭격에 희생되었다.
전투가 끝나고 하루가 지나자 섬의 크메르 루지군들은 섬을 수색하였는데 많은 무기들을 줍고 또 미군 시체를 수습하였다.
“우리는 바다에 떠 있는 미군 시체를 밧줄로 묶어 끌고 와서 모두 매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섬과 바다에 널려져 있는 미 해병들의
시체를 그냥 두고 철수하였습니다” 라고 “마오린”은 얘기하였다.
미 해병들은 또 3명의 생존자들을 두고 철수하여 버렸는데 철수 당시 기관총으로 철수를 엄호하다가 마지막 헬기로 철수하게 되어있던
“죠셉 하그로브”, “게리 홀”, “데니 마샬” 등 3명의 해병들이었다.
마야구에즈 사건이 끝나고 며칠 후 오키나와 미군 기지에서는 코탕섬에서 전사 및 실종된 해병들을 위한 추모식이 있었는데 위에 언급된
3명의 기관총 조는 빠져있었다.
이미 베트남 전에서 한 아들을 잃은 죠셉의 어머니 “샬롯 하그로브”여사는 국방부로부터 “죠셉 하그로브”가 작전 중 실종되었으며
해병들이 섬을 수색하였으나 찾지 못했다“ 는 편지를 받았으며 1년 뒤에 누이인 ”샌디 하그로브“는 역시 ”죠셉 해병은 지난 1년
간 그 섬에서 은신을 할 수 없어서 결국 전사를 하였다“라는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수년 전에 죠셉의 가족들은 북 캐롤라이나에 있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그 당시 혼란스런 철수 작전에서 실수로 “죠셉”을 철수시키지
못했다는 루머를 듣고 비통에 잠기게된다.
당시 “마오린”은 혹 있을 미군 생존자들을 찾기 위해 섬을 수색했다.
약 10일 뒤에 그들은 한 미군을 발견하였으나 항복을 거부하고 계속 저항을 하여 결국 사살하였다고 한다.
1999년에 2명의 과거 크메르 루지 고위층들이 미국의 MIA 수색 반과 만나 진술하기를 2명의 미군 포로를 잡아 시아누크빌로
호송하였으며 일주일쯤 취조하고 나서는 처형해 버렸다고 하였다.
이 두 명의 사체는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시아누크빌의 인디펜던트 호텔의 쓰레기장 땅 밑에서 발견되어 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 이외에는 우리는 생존자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모두 전사자들만 찾았습니다”라고 마오린은 말한다.
“바넷”해병은 “아직도 이들 기관총 조들을 두고 온 사실에 분노를 금할 수 없으며 생각만 하면 몸이 떨리고 꼭 누가 내 심장을
후벼파는 것 같다. 그들이 공포 속에서 구조대가 오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며 버티었는데 결국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생각 해
보라, 그 느낌이 어떠했을 것인지” 라고 울분을 토하였다.
전투가 끝나고도 수개월이 지났지만 그 섬의 크메르 루지들은 도대체 왜 미군들이 공격을 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크메르 루지들은 혹 미군들이 다시 쳐들어 올까봐 5개월 동안 그 섬에서 비상 잠복근무를 하였다.
“아마 미군들은 베트남 전에서 패하고 또 우리에게 패한 ”론놀“ 정부와 깊은 관계에 있었으니 분풀이로 공격을 했겠지요” 라고
“마오린”은 말했다.
“마오린”은 2000년 1월, 25년 전에 그가 죽인 미군 유해를 찾기 위해 미국 MIA 조사반들과 다시 이 섬을 찾게된다.
마오린은 “섬에 다시오니 이상합니다. 전쟁을 했던 이 곳에 다시 찾아오리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바넷”은 지난 25년간 1975년 5월 15일을 하루도 잊을 수가 없었고 생각만 하면 눈물이 흘렀다고 하며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또 이제는 내 마음에 평화와 안정을 찾고 싶고 하느님이 내가 크메르 루지와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올리브 나무 가지가 될 수
있게 하시어 서로간의 지난 상처를 치유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겠다고 하였다.
미 국방부는 6명의 실종 미군 유해를 확인하여 발표하였으며 2월에는 “안드레이 가르시아” 해병의 유해를 뉴멕시코에 있는 가족들에게
인계하였다.
마야구에즈 사건은 이렇게 하여 끝이 났으나 사이공 함락의 와중에 거의 숨겨져 있었다.
2000년 5월 2주 째의 월요일에 프놈펜에 있는 “켄트 위더만” 미국 대사의 관저에서는 마야구에즈호 사건에 희생된 해병들을
추모하는 조그마한 의식이 있었다.
이 의식에서 제 1서기관 “케롤 로드리”씨는 처음 공식적으로 3명의 해병들을 철수시키지 못하고 남겨진 사실을 인정하였다.
전투가 끝나고 수개월 뒤 뉴욕에서 가진 회견에서 “이엥사리” 당시 크메르 루지 외무장관은 “마야구에즈호 납치 사실을 사과하면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할 사건은 사실 아니었다“ 라고 은연중에 미국의 무모한 도발성 공격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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