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역사에피소드- 사이공프놈펜 최후의 날
 

사이공 함락보다 13일이 빠른 1975년 4월 17일, 검은 옷에 깡마른 체구의 크메르 루지 군인들이 프놈펜 시내로 진군하자 프놈펜 주민들은 길가에 나가서 착잡한 기분으로 이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프놈펜 시에 있던 피난민들을 합친 3백여만 명의 사람들은 이 “해방”으로 지난 5년간의 지긋지긋했던 내전이 드디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이 “해방”의 날은 그 동안 지독한 부정, 부패로 극도의 혐오감을 주고 있던 론놀 정권의 마지막 날이 되었는데 론놀 대통령은 4월 1일에 이미 족히 수백만 달러가 든 가방을 챙겨서 해외로 달아난 뒤였다.
이 날은 또 그 동안 프놈펜을 포위하여 식량과 모든 보급로를 차단한 후 프놈펜 시내에 계속적으로 또 무차별로 박격포와 로켓포로 포격을 가했던 붉은 혁명군의 마지막 공격 날이었다.

지난 5년간의 내전 동안 지방으로부터 적어도 2백만 명의 피난민들이 프놈펜으로 몰려들었다.
그 중 어떤 이들은 크메르 루지 해방군들의 잔악한 고문, 기아, 강제노동, 집단 학살 등의 끔찍한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부패한 론놀 정권에 반감을 갖고 있던 터라 심각하게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저항하지 마라” “전쟁은 끝났다” 프놈펜으로 진주한 붉은 혁명군들은 시내를 다니며 확성기로 외쳐댔다.
도시민들에게 이 해방군들은 이상하게 보였다.
험상궂은 표정에, 매우 검은 피부에 또 검은색의 잠옷 같은 옷을 입고 농부들이 쓰는 수건을 머리나 허리에 질끈 묶은 군인들은 굶주림 때문에 모두 수척한 모습들이었다.
이들은 사실 1960년대 중반부터 정부군을 상대로 밀림에서 싸워왔었다.
1970년에 론놀 수상이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프놈펜 정부의 권력을 장악한 뒤부터 크메르 루지들은 각성의 성도(省都)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골 지방을 점령하였다. 섬찍한 것은 상당수의 군인이 어린이였는데 이 새로운 어린 세대가 바로 크메르 루지의 선봉대였던 것이다. "해방 지역“의 가난했던 소작농들은 생전 처음으로 권력과 직책을 얻게되었고 새로운 체제에 헌신적으로 충성하면서도 또한 그 동안 쌓였던 억압감으로 인해 잔인한 행동대로 변신하였다.
도시는 대혼란 속에 빠져들었으며 식량과 약품을 탈취하는 폭도들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습격을 하였다.
모든 화폐는 통용 금지가 되고 무효화가 되었다. 크메르 루지는 곧 통금을 실시하고 시내의 각 구(區)간을 서로 다니지 못하게 하였다. 남자들은 아내와 떼어놓았고 많은 아이들이 부모를 찾아 길거리를 헤매었다.
4월 18일이 되자 전 도시 주민의 강제 소개가 시작되었다.
군인들은 공포를 쏘며 모든 주민들은 즉시 프놈펜을 떠나라고 하였다.
3백만의 프놈펜 거주민들은 차, 오토바이, 손수레, 자전거 등에 먹을 것과 옷과 돈 등을 싸서는, 또 대개는 보따리와 가방을 이고 지며 대 혼란 속에 도심을 빠져나가는 행렬에 끼여들 수밖에 없었다.

론놀 정권 당시의 모든 고위 공직자들과 군장성들은 정보부 건물에 소환되었다.
그들은 혁명군들과 협상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크메르 루지가 론놀 정권과 평화협상을 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소환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프놈펜 철도역 동쪽에 있던 정보부에 모였다.
그 동안 미국의 지원으로 유지되어 온 론놀 정권의 이들은 물론 비무장에다 서구식의 흰 셔츠에 넥타이를 맨 차림이었다.
이들과 마주하여 검은 옷에 중무장을 한 비슷한 숫자의 크메르 루지군들이 역 광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만나게 되었다.
론놀 정권의 외무부 장관인 “롱보렛”과 론놀의 동생이자 “폴폿”과는 바탐방의 시아누크 중학교 동창인 “론논“도 그 중에 끼어 있었다.
미국 대사관은 4월 12일 마지막 철수 때 이들에게 철수를 종용하였으나 이 둘은 정중히 거절하고 남은 것이었다.
평화협상이나 화해 등의 소문은 불길하게도 거짓 소문이었다.
이들은 가족과 같이 지금의 미국 대사관 신축 터이자 또 “인터네셔날 유쓰 클럽”자리였던 당시의 “써클 스포팁”으로 끌려가서는 모두 즉결 처형당하였고 그 시체는 수영장에 처넣어졌다.
시내 전역에서 론놀군 패잔병과 학교 교사들과 의사 및 공무원들은 소환을 당했다.
소환된 론놀군 장교들과 학교 교사들은 그 즉시 손을 뒤로 묶인 채 지금의 “싸츠마이”(중앙시장)광장으로 끌려가서 즉결 처형당했으며 사병들은 가족들과 같이 가장 힘든 강제 노동소로 보내어져 거의 기아, 혹사, 질병 등으로 결국에는 거의 죽어 버렸다.
더러는 또 “교육”을 위해 끌려갔는데 스탈린 시대의 러시아와 같이 그 뜻은 곧 처형이었다.

4월 17일 오후가 되자 해방군들은 가택 수색을 시작하였으며 만약 론놀 정부 때 입던 공무원복, 군복 등이나 사진이 있으면 집 앞에 내어놓으라고 했다.
론놀 정권 당시 공무원이나 군인으로 있었던 사람들은 신분을 숨기기 바빴으며 옷이나, 책, 사진 등을 태우거나 묻어야 했다.
드디어 주민들의 이동이 시작되었고 도로 변에는 즉결 처형된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하였으며 프놈펜 침공 전투 시에 죽은 정부군들의 시체가 사방에서 썩고 있었다.
즉결 처형당한 시체들 옆에는 폭도들에게 맞아 죽은 그 자녀들의 시체도 뭉그러진 채 같이 있었다.
아직 15세도 안된 것 같은 크메르 루지군들은 행렬 중에서도 수시로 사람들을 끌어내어 길옆에서 총살을 해 버렸다.
자가용차를 몰고 행렬 중에 섞여 가던 사람들은 거의 다 처형되었다.

프놈펜이 지옥으로 변하고 있는 사이에도 시 외곽에서는 아직 크메르 루지군들과 교전을 계속하고 있는 론놀 정부군들이 있었다.
현재 문교부의 국장으로 있는 53세의 “체이 찹”은 원래 프놈펜에서 승려 학교의 교사로 있었는데 내전이 일어나자 정부군에 입대하였으며 프놈펜이 함락되던 날에는 4번 도로 남쪽의 “콤퐁스푸”지역에서 기갑부대를 지휘하는 장교로 있었다.
그는 휘하 장병 2천여 명과 프놈펜 함락 후에도 4일간을 더 크메르 루지와 교전을 계속하여 콤퐁솜 항구로 가는 남진을 막았었다.
교전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크메르 루지는 계속 확성기로 선전 공세를 폈는데 전쟁은 이미 끝났고 미국은 론놀 정권을 버렸으며 지금 항복을 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체이 찹”의 부대장은 항복하기로 결정을 하였고 4월 21일 결국 백기를 들었다.
매일 C 레이션 식량 박스를 그들의 주둔 위치에 떨어트리고 가던 미군 수송기는 그날 이들의 항복을 비행기에서 보았으며 마지막 식량을 투하하고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항복한 2천여 명의 론놀 정부군들은 줄을 서라는 명령을 받았다.
모두 손을 뒤로 돌려서 “끄라마”(수건)로 손을 묶이었다.
그리고는 “혁명 조직을 지원하시는 시아누크 왕자가 사면을 해 줄 것이다”라고 그들이 말하는 사면 장소인 숲속으로 행진을 하였다.
숲속에 도착을 하자 크메르 루지군들은 포로들의 묶었던 손을 풀어 주고는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음날, 일단의 크메르 루지군들이 도착을 하였고 포로들은 다시 소대별로 나누어 줄을 서라고 했다.
이 번에는 100명씩을 굵은 밧줄로 단단하게 손을 묶었다.
포로들은 모두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100명씩 묶인 여러 단체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숲 속으로 한참 들어간 뒤 정지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크메르 루지군들은 일제 사격을 가했다.
“체이 찹”은 정말 운이 좋았다.
그는 열의 중간쯤에 서 있었는데 사격이 시작되자 얼른 쓰러졌고 그 위에 그의 기갑 부대원들이 총을 맞고 계속 쓰러졌다.
동료들의 비명 소리가 계속 이어지고 크메르 루지군들이 “혁명 만세! 제국주의자들을 없앴다! 론놀 체제를 물리쳤다!” 등등의 환호를 질러대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한참 후 숲 속에는 다시 적막이 돌아왔고 새 지저귀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체이 찹”은 몸을 일으켰다.
“체이 찹”은 등에 총을 맞은 다른 생존자를 찾아냈다.
“체이 찹” 자신은 손과 다리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은 것뿐이었다.
그들은 무조건 뛰었다.
10일간을 먹지도 못하고 숲 속을 헤맸다.
그러나 3일 째에 등에 총을 맞은 전우는 출혈이 심하여 숨을 거두고 말았다.
“체이 찹”은 4번 도로에 나와 신분을 숨기고는 철수민 행렬에 끼여들었다.
그리고는 친척들이 있는 바탐방 시로 갈려하였지만 크메르 루지는 허락을 하지 않았고 결국 “체이 찹”은 바탐방 성의 “몽 루세이” 마을에서 4년간을 위장 신분으로 강제 노동을 하며 지냈다.

1978년 폴폿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대표단들에게 자신은 전례 없는 독창적인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다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중국의 모택동과 4인방의 문화 혁명의 정책과 흡사한 것이었으며 우연히 크메르 루지의 혁명 이론과 일치하였었다.
프놈펜 시의 주민을 지방으로 완전 철수시킨다는 정책은 프놈펜 함락 수개월 전에 발상이 되었었다.
크메르 루지 생각에는 프놈펜 시에는 3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여 살릴 식량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고 또 그냥 뿔뿔이 시골로 흩어지게 하는 것보다는 더 강력하게 도시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크메르 루지들은 부자, 기름진 사람들, 고등 교육을 받은 지식층 등의 도시민들을 저주하고 있었다.
“제국주의자”들과 같이 살다가 해방 이후에야 마지못해 혁명에 가담을 한 프놈펜 시민들은 “새 인민” 또는 “4월 17일 인민”으로 불려졌으며 그들의 앞날에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당한 후일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던 “혁명 조직”의 정치국인 “앙카”는 전국에 걸쳐 쌀 생산량을 할당하였다.
캄보디아는 진보적인 국가 산업 계획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쌀 수출을 그 재원으로 보고 과잉 쌀 생산을 하여야 했다.
모든 지방이 가능한 생산량보다도 많은 쌀 생산 할당을 받았지만 프놈펜 주민들이 거의 정착한 바탐방 성은 특히 달랐다.
한때 캄보디아의 곡창 지대였던 이 북서쪽 지방은 전쟁 때문에 불모지대가 되어 버렸는데 “4월 17일 인민”들이 이 농토를 다시 개간해야 했다.
중노동의 농사 경험이 전혀 없는 프놈펜 주민들은 년 중 가장 더운 4월의 뙤약볕 아래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서 바탐방으로 가야 했다.
행군 도중에 노약자와 어린이들은 수없이 쓰러졌다.
바탐방에 가서도 이들은 그들이 생산한 쌀은 먹을 수가 없었고 풀 같은 죽만 마시고 살아야 했으며 가끔 구할 수 있는 푸성귀나 잡은 벌레들이 유일한 반찬이었다.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이 연일 수백 명씩 속출하였다.
크메르 루지들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살아 있다고 해서 국가에 득이 되는 것이 없으며 너희들이 죽는다고 해서 국가가 잃을 것도 없다”고 했다.

프놈펜의 “툴 톰퐁”에 살고 있는 정년 퇴직한 내과 의사 출신인 “칩 랭 스랭”씨(62세)는 26년 전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검은 옷을 입은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왔지요.
우리들은 집 앞에 흰색 깃발을 만들어 걸었어요.
아침에 수십 명의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왔는데 그들은 자동차 타이어를 잘라서 만든 소위 호지명 산달을 신고 있었고 말투들이 매우 거칠었어요.
그들은 확성기로 주민들은 침착하게 집안에 있으라고 했어요.
그리고 또 론놀 정부와 같이 일하기로 협상을 했다고 했어요.
우리들은 그 소리를 믿고 모두 기뻐했지요.
그러나 몇 시간이 지나자 24시간 통금령이 내려졌고 우리들은 집안에서 꼼짝을 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병원에 남아 있었던 나의 동료들은 집에 갈 수가 없게 되었지요.
다행히 그 때 나는 집에 있었으므로 가족과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지요.
크메르 루지들은 미군이 프놈펜을 폭격할 것이니 모두 프놈펜을 떠나라고 했지요.
그들은 사흘 정도만 가면 된다고 했고 “앙카”가 부모나 같으니 돌봐 줄 것이라고 했어요.
우리는 집에 약간의 옷은 남겨두고 먹을 것을 싸서 집을 나섰지만 온 시내에 철수민들이 차서 움직일 수가 없었지요.
사흘이나 지난 4월 20일에서야 우리는 겨우 프놈펜을 빠져나갈 수 있었는데 나는 오토바이에 짐을 싣고 휘발유를 구할 수 없어 오토바이를 밀면서 “깐달”에 있는 친척집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5개월이 지나자 그는 가족들과 같이 바탐방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바탐방에서 그는 집을 짓는 일과 야채를 기르는 일을 맡았으며 아내와 아이는 논에 가서 일을 해야 했다.
얼마 뒤에 그는 아내가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아내는 병원은 고사하고 심지어 간단한 해열제의 투약도 금지되었고 계속 논에 나가서 일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어느 날 아내는 논에서 실신을 하였고 곧 숨을 거두었다.
그의 두 아들도 얼마 안 가서 심한 이질에 걸려 죽고 말았다.

3백만 주민 소개가 끝난 프놈펜 시에는 선전문을 만들거나 몇 안 되는 동맹 국가들과 외교 업무를 담당한 행정 요원들을 위주로 한 크메르 루지의 고급 간부 2만 여명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또 시내 전역의 빈집들을 뒤져서 귀중품을 찾아내는 일들과 론놀 정권의 모든 잔재를 없애버리는 임무도 맡았다.
“모니봉”가와 96번 가의 모퉁이에 있던 오래된 성당은 그 흔적 하나 남기지 않게 마지막 벽돌 한 장까지 철거되었다.
또 화폐를 없애버리는 정책에 따라 “노로돔”가와 41번 가 사이 모퉁이에 있던 국립은행도 폭파되었다.
시 외곽에서는 백만이 넘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 프놈펜 시내 거리에는 돈 다발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단 하나의 옛날 상징이 남아있었는데 그것은 1975년 말에 북경에서 돌아 온 시아누크 왕자였다.
그러나 시아누크는 귀국을 하자 말자 왕궁 뒤편에 있는 조그만 빌라 안에 자택 연금을 당하고 말았으며 가끔 생명의 위협을 느껴 가면서도 그 안에서 편히 다음 3년을 지냈다.
1977년이 되자 폴폿의 “민주 캄푸치아”와 옛 공산주의 동맹국인 공산 베트남간에 분쟁이 발생하였다.
분쟁의 발단은 국경 문제였으며 결국 1979년 1월에 베트남군은 프놈펜을 점령하고 10년간의 군사 주둔 및 정치 간섭을 하게 된다.

론놀의 호위병을 지냈던 헌병 장교 “메스 칭”의 아내 “끄리”(50세)는 지금 프놈펜의 “멘체이”에서 노상 식당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1975년 4월 17일 남편의 말에 따라 모든 군복과 사진, 책 등을 집 앞 바나나 나무 밑에 묻어 버리고는 18일날 집을 떠나 시외의 부모님 집으로 갔었다.
친정에서 21일까지 있다가는 크메르 루지군에 의하여 끌려 나왔으며 그날이 결국 부모님들과는 영원한 이별의 날이 되고 말았다.
“끄리”는 3개월이나 걸어서 바탐방의 집단 농장으로 끌려갔는데 신분을 속였기 때문에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1977년 4월에 그녀는 집단 농장에서의 노동의무 기간이 끝나게 되어 남편과 5살 난 아들이 남아 있었던 마을에 찾아 갈 기회가 생겼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이웃들의 얘기는 크메르 루지 군인들이 와서 남편을 “교육”시키러 데려 갔다고 했어요.
교육이란 거 결국 죽이는 거지요 뭐.
5살 난 아들이 울면서 아버지를 붙잡고 매달렸었대요.
그러나 크메르 루지 대장이 아이를 움켜쥐고 가로수 나무 뿌리에 내동댕이쳤답니다.
정말 부처님이 돌봐 주셔서 아이는 죽지 않았어요“.
그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웃들의 말로는 남편이 죽은 것을 알고 그녀는 몇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었다고 한다.
남편 이외에도 그녀의 부모들과 형제 자매 6명이 모두 크메르 루지에게 처형당했다고 한다.
도마질을 하고 있는 그녀 옆에는 유일한 혈육인 그 떄 살아난 아들이 TV를 보고 있었다.
베트남군이 프놈펜을 “해방?”한 뒤에 그녀가 프놈펜에 다시 와 보니 길은 텅 비어 있었고 노략질을 한 뒤의 쓰레기들만 뒹굴고 있었다.
문과 창문들은 모두 뜯어지고 부서져 길바닥에 던져져 있었으며 그녀의 옛날 집은 다 허물어져 버리고 잡초만 무성하게 뒤덮고 있었다.
그녀는 근처의 빈 아파트를 하나 차지하여 어린 아들과 새 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프놈펜 귀향민들의 얘기는 모두 비슷한데 ”칩 랭 스랭“도 아내가 죽은 후 프놈펜이 해방되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프놈펜 시내에 들어서니 온 길거리는 부서진 전축 판이나 쓰레기 같은 것으로 가득 찼고 어떤 구역은 베트남 군인들이 지키면서 출입을 할 수 없는 동네도 있었습니다.
아주 가끔 길에서 사람을 볼 수 있었지요.
프놈펜은 유령 도시처럼 조용했어요.
길은 있어도 다니는 사람이 없었고 집들은 많았어도 사는 사람이 없었지요.
내가 살던 옛 집은 다 부서져 버렸어요.
그래서 다른 빈집을 하나 골라서 살기 시작했지요".
프놈펜은 집 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그는 칼멧 병원에서 다시 내과 의사로 근무를 시작했지만 많은 동료 의사들이나 간호사들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