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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은 벌써 1년 째 형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하와이에서 살고있는 형 “마이클”이 요트를 좋아하여 가끔씩 소식이 끊기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적이 전에는 없었다.
그런데, 1979년 11월 국무성에서 갑자기 편지가 날아왔다.
형 “마이클”이 요트를 타고 태국만을 항해하다가 크메르 루지에게 납치되었다는 것이었다.
“칼“은 형을 찾아보기로 결심을 하고 다음달 12월에 형이 마지막으로 기항했었던 싱가폴로 떠났다.
싱가폴의 한 호텔에서 칼은 우연히 TV뉴스를 보게되었는데 뉴스에서는 마침 크메르 루지가 고문과 취조를 하던 “툴스랭“ 감옥의 특별 취재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이 때는 베트남군이 프놈펜을 점령한 후 발견한 “툴스랭” 감옥의 잔인한 장면을 CNN 방송을 통해 보도를 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것은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명분을 외국에 알릴 수 있는 아주 좋은 호재였음에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송을 지켜 본 “칼”은 참 무서운 곳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화면에 알려진 피해자들의 명단이 나오면서 형의 이름이 뚜렷이 나타났다.
"칼“은 믿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숨이 막혔다.
한참 뒤 진정이 되고서야 “칼”은 형의 불행한 운명을 고통보다 더한 슬픔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적어도 14,000명 이상의 캄보디아인들이 고문 끝에 죽어간 소위 S-21취조실(툴스랭 감옥-원래 프놈펜 시내 툴스랭 쁘레이 중등학교 자리)에 정말 운이 나쁜 아주 소수의 외국인들도 잡혀서 고문을 받다가 죽어갔는데 그 중에 형 “마이클”이 포함되어 있어 버린것이었다.
마침 툴스랭에서 형 “마이클”이 남긴 진술서가 발견이 되었다.
진술서에는 장문의 개인 신상 명세에 이어 그가 CIA의 첩자라는 자백으로 끝을 맺었다.
그는 베트남군이 프놈펜을 함락하기 바로 이틀 전인 1979년 1월 5일, 처형되었었는데 이틀만 더 버티었으면 살수도 있었다.

“마이클“이 죽은 이틀 뒤 베트남군은 프놈펜을 함락하여 크메르 루지 공포정치 4년의 막을 내려 버린것이다.
크메르 루지가 집권을 시작했던 1975년에서부터 2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독히도 운이 나빴던 “마이클” 이나 그 외 이 곳에서 죽어간 몇몇 외국인들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는 알려질 수가 없었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이 다른 수천 명의 캄보디아인들과 같이 조작된 간첩 혐의를 받고 또 강요된 간첩 행위를 자백하고는 지독한 고문을 받으며 죽어갔다는 것 밖에 없다.

“Michael Scott Deed”는 캘리포니아의 롱비치에서 태어났다.
롱비치에는 수천 명의 캄보디아 피난민들이 정착해서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는 롱비치의 태평양 바닷가에서 파도타기를 즐겼다.
그리고 친구들과 같이 요트를 모는 것을 더 좋아했다.
월남전이 한창일 때 롱비치 해안은 몰려드는 월남과 캄보디아 피난민들로 붐비기 시작했고 바다도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마이클“은 어릴 적 친구인 “크리스 딜렌스”와 같이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는 하와이로 가기로 하였다.
수년 뒤, 그는 친구와 같이 60피트 짜리 요트 “Leilani"를 타고 태국만을 항해하고 있었다.
그들이 왜 그 곳에 갔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태국에서부터 마약 밀수를 하려고 가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이클”에 대해 “칼”과 긴 시간을 얘기했던 역시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요트를 타며 자랐던 전쟁 범죄 역사가인 “피터 마귀어”씨는 당시 누구나 그런 빨리 떼돈을 벌 수 있는 일에 흥분을 하였고 또 놀라워했었다고 하였다.
당시 흔히 태국에서 대마초를 사서 미국으로 운반을 하여 큰 돈을 벌기도 했었는데 이 때 이런 대마초 밀수를 주로 했던 사람들은 캘리포니아나 하와이에서 파도타기나 요트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도 한다.
“그 얘기는 별로 이상한 얘기가 아니었어요.
아마 “마이클“은 그런 밀수 작전에 막차를 탔던 젊은이 같아요.
어떤 경우라도 그들이 아무 죄가 없다고는 단정할 수 없겠지만 결국 그들의 불행한 운명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S-21에 잡혀온 “마이클”, “딜렌스” 및 다른 외국인들은 거의가 크메르 루지의 해안 경비정에 의하여 바다에서 잡혀온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들이 과연 영해 침범을 했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설사 영해 침범을 했더라도 고의적이기보다는 항로를 잘 못 벗어난 경우였었을 것이다.
“당시 크메르 루지가 해안 경계를 강화하고 있었던 이유는 첫째 베트남 해군의 침범을 막자는 것이었고 둘째는 태국 어선들의 영해 침범 불법 조업을 막자는 데에 있었습니다.
당시 잡힌 외국인들은 그야말로 운 나쁜 때에 운 나쁜 장소에 있었던 겁니다“.
런던에 있는 아시아 아프리카 연구 학회에서 크메르 역사 전문가인 “스테판 헤더”교수의 얘기였다.

툴스랭 감옥에 남겨진 문서를 조사한 결과, 4명의 미국인, 2명의 호주인, 3명의 프랑스인, 1명의 영국인, 1명의 뉴질랜드인 그리고 수명의 파키스탄, 태국 및 베트남인들이 외국인으로 잡혀와서 처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프놈펜으로 끌려와서는 360번 가에서 좁은 골목길로 접어든 후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낡은 학교를 개조한 이 곳으로 들어갈 때 이미 어떠한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았을 것이며 그 공포에 질린 심정은 상상하기가 힘들 것 같다.
그들이 툴스랭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범 수사관들의 말은 다른 캄보디아 죄수들과 같이 지냈을 것이라는 얘기다.
교실에 여러 명이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채로 옆으로 포개서 잠을 자야 했을 것이고 아니면 좁은 독방에서 족쇄에 묶인 채 갇혀 있었을 것이다.
베트남군이 쳐들어 왔을 때 이 툴스랭 감옥에서 12명의 생존자를 찾아냈다.
그러나 다섯 명은 후유증으로 얼마 안 가서 사망을 했고 또 여섯 명도 그 후 병으로 모두 죽어 버렸는데 마지막 생존자인 “반 낫”은 서양인들이 감옥에 같이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그러나 그도 죄수로 갇혀 있었으므로 더 이상 그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서양인들이 모두 크고 털이 많았다고 하였다.
어떤 때는 미국인들이 감옥 안에서 밤에 노래를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 감옥의 총지휘관이었던 “득크“는 지금 프놈펜의 감옥에 갇혀서 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영국 죄수는 매우 점잖았다고 기억했다.
죄수들은 아침 일찍 기상을 하여 한쪽 발목은 족쇄에 묶인 채 운동을 하였다.
당시 겨우 13세 전후의 소년 병들이 간수를 하고 있었으며 수시로 죄수들을 때리거나 욕을 해 댔었다고도 한다.
먹는 것은 물론 극히 적어서 모두 피골만 남았었다.
감옥의 생활은 고통과 공포에 휩싸인 지루한 생활이었을 것이며 특히 조그만 취조실에 끌려가서 취조를 받을 때는 더했을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제국주의에 물든 자들을 없애버리고 또 내부 반동분자들을 숙청하려던 크메르 루지가 조작한 진술서에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 취조의 마지막 목적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툴스랭 감옥에서는 수천 개의 죄수 파일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취조관의 보고서가 첨부되어 있었으며 내용은 죄수들의 지난 과거와 4년간 캄보디아를 절대적으로 지배했던 “앙카”(크메르 루지의 정치국) 또는 혁명 조직에 반역을 했다는 보고서로 되어 있다.
그 파일 중에는 툴스랭 감옥에서 생을 마쳤던 몇몇 외국인들의 진술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술서들은 한결같이, 내용의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죄수 모두가 캄보디아를 파괴하려 했고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앞잡이였다는 내용이었다.
호주인인 “데이빗 로이드 스캇트”는 그의 삼촌이 CIA 에 근무하고 있었고 CIA가 훈련을 시키기 위해 만든 대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캄보디아에 첩보활동을 하러 왔었다고 진술하였다.
“나의 임무는 캄보디아의 해상 방어 상황을 염탐하여 CIA의 첩보 선박이 침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1979년 초에 캄보디아에 침투한 간첩들을 교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진술서에 기록되어 있다.
“스캇트”와 같이 포로가 된 동료 선원 “로날드 케이트”는 그들 둘이 크메르 루지 경비정에 잡히던 마지막 날의 상황을 진술서에 남겨두었는데,
“데이빗은 교대를 위해 잠에 취해 있던 나를 오후 10시에 깨웠었다.
내가 교대하자 1분도 안되어 데이빗은 잠에 떨어져 버렸고 11월 2일 새벽 1시 30분에 우리는 캄보디아 경비정에 나포되었었다“라고 했다.
툴스랭 감옥의 기록에는 이 두 사람은 심한 구타와 매질과 전기 고문 뒤에 교수형으로 처형하였다고 되어있었다.
툴스랭 감옥에서는 허위 자백을 받아내는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수백 시간을 반복하여 같은 취조를 계속하여 지치게 만들고 자칫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였다.
감옥의 일지에는 죄수들을 고문할 때 담뱃불로 지지고, 손톱을 뽑고, 숨을 쉴 수 없게 하고, 소변을 마시게 하고 심지어 똥을 먹이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툴스랭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중 최근에 눈을 감은 “엠찬”은 그가 고문을 받았던 기억을 말해 주었는데 간수들이 고무 호스를 그의 목구멍에 쑤셔 넣고는 물과 젓국을 그가 구토를 일으킬 때까지 부어넣었다고 했다.
이러한 고문은 계속 반복하여 며칠을 계속했었다고 한다.
그가 정말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조각가였기 때문이었는데 간수들은 그가 조각가였다는 것을 알고는 폴폿의 흉상을 만드는 일을 그의 복역 기간 중 계속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을 포함한 다른 모든 죄수들은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아무런 기회도 갖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죄수들은 진술서에서 그나마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들을 은연중에 남기기도 했다.
1978년 초에 친구“랜스 맥나마라”와 같이 잡혔던 미국인 “제임스 클라크”는 진술서에 “동남 아시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나라는 캄보디아인데 왜냐하면 가장 성공한 공산국가이기 때문이다”라고 써서 지독한 공산주의 국가라는 것을 암시하였다.
그의 진술서는 또 마치 냉전 시대의 이론을 담은 교과서 같은 문구로 되어 있었는데 “미국의 생각에는 만약 캄보디아가 강력한 국가로 커지면 이웃 태국을 침략하여 공산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태국 다음에는 말레이시아를 공산화하기가 쉬울 것이고 싱가폴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절대로 싱가폴까지 공산화되는 것을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되어 있었다.
“클라크”는 또 그의 진술서에서 그가 1969년 7월에 그가 월남전 참전에 징집되었으나 거절을 하여 2년간 징역을 살았었다고 하였다.
진술서의 상당 부분은 사실이었는데 취조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클라크”가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꾸며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때로 진술서는 취조관이 미리 써 놓고 죄수로 하여금 서명을 강요한 것도 있었다.
“클라크”의 진술서에는 그가 미국에서 2년간 감옥 생활을 할 때 처음으로 CIA와 접촉을 하였다고 되어있었다.
복역을 마치고 석방이 되자 그는 요트를 건조하기 시작했으며 CIA와는 계속 유대를 가졌다고 했다.
진술서는 또 계속하여 “CIA의 ‘빌’과 ‘시드니’란 자들이 나의 요트로 돈을 벌어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내가 아는 것은 멕시코에서 대마초를 밀수하는 것이 큰 돈을 버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는 밀수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위험성과 반대급부, 그리고 모험심 등이었다.
그러자 빌은 그가 CIA에서 일하고 있다고 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는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일부러 밀수를 하고 있다고도 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클라크”는 친구 “랜스 맥나마라”를 꼬여서 같이 합류하게 했다고 진술하였으며 캄보디아 침투의 임무는 선박, 섬들 그리고 통신시설 등을 촬영하는 임무라고 진술하였다.
1978년 4월 18일 크메르 루지 경비정이 접근할 때 이들이 탄 요트는 캄보디아 영해 내에 있었던 것 같다.
경비정은 Cal.50 기관총과 20mm 기관포로 무장되어 있었다.
"우리 요트로 갑자기 총알이 날아오기 시작하자 우리는 해적의 습격인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 해역에 월남군 패잔병 등이 해군 경비정을 이용하여 해적으로 변신, 상선을 습격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권총 15발을 그 쪽으로 쏘았고 친구 ‘랜스’도 가지고 있던 기관총을 쏘아 해적들이 도망가기를 바랬습니다".
그러자 크메르 루지 경비정은 즉각 20mm 기관포로 응사를 했으며 포탄은 요트를 벌집 내어 배를 멈추게 했다.
클라크는 그가 체포됨으로써 CIA의 임무가 끝이 났다고 진술하였다.
그와 친구 “맥나마라”는 이 임무가 성공했더라면 CIA로부터 110만 달러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고 진술했다.
또 “캄보디아에 대해서는 CIA가 끝없이 첩보 요원들을 침투시킬 것이다”라고 진술을 했다.
시키는대로 진술한 “클라크”의 진술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결국 그들은 계속된 고문을 당하던 끝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집단 학살을 조사하는 “크레이그 엣치슨”씨는 말하기를,
“크메르 루지 지도부에서는 이 미국인 포로들을 뜨거운 감자를 쥔 것처럼 아주 어렵게 생각했는데 이들을 고문, 살해 한 비밀을 숨기기 위하여 시체를 태워 버렸습니다.
이 미국인들의 시체는 툴스랭 가까운 곳에서 폐타이어와 같이 소각하여 아주 재로 만들어 버렸지요“.
시체들을 태워 버리라는 명령은 폴폿 다음으로 서열 2위였던 “눈 체아”가 내렸다.
왕 시아누크로부터 사면을 받고 지금은 파일린 시에서 자유롭게 살고있는 “눈 체아”는 나중에 말하기를 “캄보디아인들이 외국인의 유해를 주어서 암거래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소각 지시를 내렸다”고 했다.

“마이클 디드”와 “랜스 맥나마라”는 툴스랭에서 숨진 마지막 외국인 희생자였다.
그들은 베트남군의 침공 일주일 전인 1979년 11월 24일 나포되었었다.
취조 중에 “디드”는 자기 인생의 상세한 부분까지 진술을 하였다.
그도 역시 미국에서 첩보원 훈련을 받았다고 했다.
“그들은 무기를 어떻게 사용하고, 어떻게 무전기를 사용하여 그들과 교신을 하고 또 사진은 어떻게 찍어야 하며 지도는 어떻게 보는 것인지를 교육시켜 주었다”라고 진술하였다.
동생 “칼”은 이 진술서가 놀라울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CIA 관련 진술 부분만 지어낸 것이지 형 “마이클”의 인생에 관한 진술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래 많이 얘기하면 고문을 덜 받았으므로 자연히 많이 지어내야 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입니다” “칼”이 “마귀어”에게 한 얘기였다.
“칼 디드”는 1999년 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20년간을 그 자신의 운명으로 알고 형의 유해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1980년에 “칼”은 캄보디아에 와서 생존자 “반 낫”과 같이 툴스랭에 가서 베트남 군들이 프놈펜 함락 후에 발견하여 툴스랭 마당에 묻어준 몇 개의 무덤을 다시 파 보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형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형의 유해를 찾기 위해 같이 도와 준 캄보디아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우리들은 같은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어요.
모두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나는 절대로 나의 슬픔을 그들과 비교하지는 않습니다.
엄청난 고통을 받았던 그들의 슬픔은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더 큰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4년간의 크메르 루지 통치기간 동안 프놈펜 시내 한복판 툴스랭 쁘레이 고등학교에 자리한 이 S-21 취조실(또는 security-21)에서는 적어도 14,000 여명의 사람들이 고문 끝에 처형되었으며 심지어 툴스랭 감옥에서 간수로 근무하던 자들도 79명이나 “반동“으로 처형되었으며 그 중에는 24명의 취조관들도 ”반동“으로 하루아침에 취조관에서 죄수가 되어 동료들로부터 고문을 받고 처형되었다.
그 중 4,000 여명의 진술서가 다행히 남아 있어서 증거로 국립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으며 또 사본이 유엔에 제출되었다.
베트남군이 프놈펜을 점령했을 때 정말 운이 좋았던 12명의 생존자들이 거의 사망 직전에 유일하게 남아 있었으며 취조실에는 묶어 놓고 린치를 가하던 철 침대 위에 막 처형한 죄수들의 피비린내 나는 사체들이 그냥 남아 있었다.
크메르 루지의 고위직 약 500명도 이 곳에서 반동으로 숙청을 당했는데 그 중에는 민주 캄푸치아(크메르 루지 정부) 정보부 장관 “후님”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당 중앙 위원회 위원 30명도 처형되었었다.
폴폿, 눈 체아, 이엥사리 등 당 서열 1,2,3,위의 지도급들이 직접 처형을 지시했다는 물적 증거는 아직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명령 체제가 수직 하달이었으므로 그 죄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 장관을 지냈던 “손센”이 “득크”를 이 곳 책임자로 임명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손센”은 1997년 폴폿의 호위병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을 당한다.
밤에는 비명 소리가 1.5km 밖에까지 들렸다고 당시 이 곳의 경비원으로 있었던 크메르 루지 출신 군인이 말하고 있다.
이제 이 감옥은 관광객에게 공개되어 지난날 의 그 참상을 말해 주고는 있지만 벽에는 희생자들의 해골을 엮어서 만든 캄보디아의 대형 지도가 걸려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섬찍하게 한다.
그 해골이라도 추슬러 영혼을 달래고 묻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