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역사에피소드- 크메르루진 출신들
 

황토 먼지에 뒤덮여 누렇게 되어버린 시골의 한 마을 회관에 어느 날 아침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금 바야흐로 사람들은 그들이 하고팠던 수십 년이 지난 숨은 얘기들을 대중 앞에서 털어놓을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그들이 크메르 루지 정권 하에서 겪은, 일가 친척들과 부모 형제들을 피눈물 속에서 잃었던 이야기들을 안전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이 시간까지 기다리는 데에는 그야말로 수십 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모임이 시작되고 시간이 제법 흐르자 평범하게 생긴 한 마을 경찰이 일어섰다.
그는 청중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과거에 대한 그 동안의 토론과 또 때때로 유명했던 학자들도 생각지 못했던 정말 근본적인 질문을 불쑥 던졌다.
“누가 크메르 루지요?”
그러나 어떠한 대답도 아직 이 초라한 시골 경찰의 질문을 만족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누가 그랬는지 그 모두를 알고 싶습니다.
“비록 그 명단에 현 정부의 장관님들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말입니다”.
시골 경찰의 말이었다.
이 시골 경찰의 발언이야 말로 사람들 사이에 그 동안 숙덕대기도 하고 또 소문으로 떠돌고 있던 그런 의문이었다.
그의 발언이야말로 크메르 루지가 폴폿이나 그 측근들만 두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막후에서 크메르 루지를 위해 일하거나 지지하였던 수십 명의 지식인들도 포함하는 함축된 질문이었던 것이다.
이 두 번 째 유형의 지식인들 중에는 현 정부에 적어도 두 명이 있는데 바로 현직 재무부 장관 “켓치은”과 외무부 장관 “호남홍”이 그들이다.
체제를 이끌었던 다른 수십 명의 당원 내지는 그 동조자들과는 달리 이 두 명은 한 때 잔악했던 크메르 루지 정권의 정책 실무자로 체제를 유지하였을 뿐 아니라 현 정권에 까지도 막강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성공적인 인물들인 것이다.
크메르 루지 시대를 비롯하여 1970년대 캄보디아의 비참했던 시절을 증명하는 수만 장의 증거 서류들 속에서 이 두 사람이 크메르 루지의 결정권을 이루는 권력 내부에 있었거나 또 그리하여 이백만에 가까운 국민들을 죽게 한 책임이 있다는 명확한 증거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여러 정권들이 바뀌는 동안에 어렵게 살아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아직까지 귀하게 남아있는 문서들과 또 집단 학살 수사관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체면과 현재의 부귀영화를 지키고 싶어하는, 정치 카멜레온 같은 이 두 사람이 그 동안 인정하고 증언하는 것보다는 사실 더 깊이 크메르 루지에 관여가 되었었다고 한다.
"켓“ 및 ”호“ 두 사람의 이러한 발뺌은 그들을 증인으로만 취급할 것인지 혐의자로 취급할 것인지 앞으로 다가올 유엔 심판을 기다려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최근에도 자신들은 아무런 잘못한 것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과거를 자세히 살펴보면 왜 지난 수년간에 그들과 또 정부가 크메르 루지 재판 건에 대한 진행에서 손을 떼기를(유엔에 넘기는 것을) 싫어했는지 이해할 수가 있다.
만약 이 두 사람이 정말 크메르 루지 일당에 깊이 관여가 되어 있었다면 그러한 심문 절차의 진행 과정에서 두 사람이 감추려고 하는 과거가 드러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마 예의 그 초라한 시골 경찰의 질문에 대한 첫 번 옳은 대답이 해 지는 것이 될 것이다.

1960년대에 “켓치은”은 파리에서 유학을 한 뒤 월맹 공산당의 지도를 받고 있던 수십 명 도시 좌익 공산주의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극도로 부패했던 노로돔 시아누크 왕자의 정권 하에 적개심으로 가득 찼던 이들의 세력은 많은 동조자를 얻어 급속도로 커져갔었다.
다른 많은 좌익들도 그랬듯이 “켓”도 한 때 시아누크 정권 하에서 일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1963년에 젊은 기술자였던 그는 시아누크가 政敵으로 간주하여 작성한 탄압 대상 명단에 오르고 말았다.
이 명단에는 또 당시 팽창하고 있던 공산당 내의 “사롯사(폴폿)”, “이엥사리”, “키우삼판”, “손센”, “호눈” 그리고 “후님”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모두는 나중 1970년대에 크메르 루지 정부(민주 캄푸치아)의 주도적인 권력자로 떠오른다.
시아누크 왕자가 이들을 “크메르 루지”(붉은 크메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사실 1970년대 이전 부터였다.
시아누크 왕자는 1970년 론놀 수상의 쿠데타에 의해 대통령에서 축출이 되자 급선회하여 그 동안 적이었던 크메르 루지와 동맹을 맺고 정치 및 군사적으로 론놀 정권에 대항을 하였다.
이 동맹은 소위 “연합전선-United Front"이라고 명하였으며 시아누크 왕자의 망명 정부 역할을 하였고 그 내부에는 불과 얼마 전까지도 왕자의 탄압 대상자 명단에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당시에 “켓”은 북경에 있던 연합전선 망명정부의 본부에서 시아누크 왕자와 같이 생활하고 있었으며 망명정부의 산업부 장관직과 캄푸치아 공산당 중앙 위원회 위원직을 맡고 있었다.
이 직책을 맡은 이후로 “켓”은 연합전선 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북경에 왔던 수백 명 지식인들과 같이 일을 할 수 있었다.
크메르 루지는 캄보디아의 지방에서부터 세력을 확장하여 결국 1975년 4월 17일 프놈펜을 점령한다.
그리고는 바로, 연합전선의 지식인들은 캄보디아로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의 대다수는 북경에서 비행기를 타고 캄보디아로 왔지만 “켓”과 일부는 월남에서부터 호지명 루트를 따라 캄보디아로 왔다.
이 호지명 루트를 따라 귀국을 한 자들은 가장 철저한 공산주의자들이었다는 史家들의 평이다.
“켓”은 캄보디아에 도착하자 “인권 보호 업무”를 맡은 혁명운동에 새로 가담한 사람 하나와 만나게 되는데 프놈펜을 함락하고 일주일이 되었을 때 “스뚱 뜨랭”성의 지역 본부에서 서로 상면하였었다.
이 인권 보호 요원은 그의 가족들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였지만 “켓”에게 말하는 것을 매우 꺼려하였다.
이 인권 보호 요원은 지금도 자기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며 사무실 바깥에서 주말에만 은밀히 만나기를 원하였다.
“우리는 ‘켓치은’이 아주 중요한 장관직을 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평소에 하는 처신을 보면 그가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도 나는 어떤 얘기를 하는 것이 매우 두렵습니다“.
얼마 후 이 젊은이는 충성심과 인내심을 시험받기 위해 서쪽 멀리 있는 작업장으로 전근을 가서 수년을 근무하였다.
그리고 “켓”은 그 후 프놈펜으로 가서 민주 캄푸치아 정부의 주요한 직책을 맡아 근무를 하였던 것이다.

“호남홍”은 1970년대에 몇 안 되는 공산당 골수 분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처음 왕권에 매우 충성하였으며 중산층의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파리에서 유학을 마치고 나자 파리에 있던 “연합전선” 망명 정부의 대사관에서 1970-1973년 사이에 서기관으로 근무를 했으며 그 후 쿠바 주재 캄보디아 망명정부 대사로 발령을 받아 근무를 하였다.
그는 1975년 후반에 다른 대부분의 귀국자들과 같이 북경에서 비행기를 타고 캄보디아로 귀국을 하였다.
미국 국무성의 비밀 문서에는 “호”도 “연합전선” 지도부의 일원이었지만 탄압 대상자 명단에 들어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호”는 “켓”과는 달리 주로 프랑스 파리와 쿠바의 하바나에만 있었으므로 혁명 단체와 그리 깊은 관계는 가지고 있지 못했고 또 귀국 한지 얼마 안되어 모두가 생소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호”의 친구이자 대사관 동료였던 “반피니”도 탄압 대상자 명단에 끼어 있었는데 1971년 프놈펜 주재 미국 대사관의 본국 보고서에는 “‘반피니’는 ‘호남홍’과 같이 1970년대에 시아누크에 반대를 하였는데 이유는 시아누크가 너무 사치하고 호화롭게 산다는 것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둘은 연합전선의 활동에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감에 따라 그들의 특권 중산 계급층 생활을 과감히 버렸다.
그리고 나중 “반피니”가 1977년 “툴스랭” 감옥(S-21 취조실)에서 고문 끝에 죽는 숙청을 당할 때까지 같이 노력하고 같이 생활을 하였었다.
“툴스랭”감옥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이 시기에 “호”는 친구 “반피니”가 감옥의 간수들과 죄수들 간의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되어 있다.

1975년 민주 캄푸치아가 정권을 잡은 후에 “호”와 “켓”같은 지식인들은 적어도 1만 명 이상이 귀국 종용을 받고 귀국을 하였으며 그 중 수백 명은 처형을 당하였으며 또 나머지 대다수는 강제 노역장에서 병이나 기아로 죽어갔다고 보고 있다.
지금껏 살아남은 몇몇 지식인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대개가 비슷하다.
이들은 당시 연합전선과 관련이 있던 없던 간에 월남전의 여파로 파괴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귀국을 해 달라는 민주 캄푸치아 정부의 요청을 받았거나 또는 스스로 결심하여 귀국을 하였던 것이다.
프놈펜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이 기대하였던 번성하고 있는 도시는 찾아 볼 수 없었으며 대신에 한 때 관공서로 쓰던 지저분한 건물에 돼지떼같이 수용되어 공동 거주를 하여야 했다.
주민 소개 이후 쓰레기가 나뒹구는 시내를 통과하면서 섬찍함을 느꼈을 뿐 아니라 애원에도 불구하고 옛집에는 가 볼 수도 없었다.
귀국자들은 모두 시내에 위치한 수용소에 수용되어 일정 기간의 정치 재교육을 받아야 했다.
귀국자들은 체제를 위하여 채소를 재배하거나 문서를 번역하는 등의 일을 하였다.
일부는 악명 높은 지방 노역장으로 가기도 했고 상당수인 수백 명은 프놈펜에 남아서 일을 하였었다.
생존자들의 말이 일치하는 부분은 “켓”은 외무부 장관 “이엥사리” 밑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엥사리”는 민주 캄푸치아의 서열 3위였던 자며 한때 부수상을 지내기도 했고 지금은 왕의 사면을 받고 파일린에서 살고 있는 거물이다.
생존자들의 말에 의하면 “호”는 프놈펜시 남쪽에 있던 한 학교를 개조한 정치 재 교육장 “벙 뜨라벡 수용소”에서 귀국자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수용소 소장을 지냈다고 한다.
크메르 루지 체제에 대한 국제적인 범죄 여부를 논할 때 이 두 사람의 혐의에 관하여는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相異하기 시작한다.
수상이 소속되어 있는 CPP당 소속인 “켓”과 “호”에 충성스런 자들은 이 두 사람이 유혹되어 캄보디아로 귀국하였다고 진술한다.
또 다른 귀국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귀국하면서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4년간 인질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생존자들 중 반대당인 푼신팩 당 측의 사람들 얘기는 이 두 사람은 시아누크 왕자와 비슷하게 꾀 많은 기회주의자들로 1975년 이전에는 크메르 루지 측에 가담하였으며 그들이 보기에는 “켓”과 “호”은 크메르 루지의 혁명운동에 잔류하여 악질적이었을 뿐 아니라 자진하여 크메르 루지 정책에 호응하였다고 한다.
서쪽 태국 국경지대의 파일린 시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전 크메르 루지의 “이엥사리”를 위시한 지식인들 및 군인들과 “이엥사리” 밑에서 일을 했던 이 두 사람은 매우 친한 사이다.
아직 많은 생존자들은 이일들을 애써 상세히 말하려 하지 않고 있는데 괜스레 아는 체하다가 나중의 범죄 재판에 증인 등으로 휩쓸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들이 確言하는 것은 한정된 몇몇 지도급들은 당시 체제의 극비 내용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인데 이제는 이들 중 대부분이 이미 죽었거나 구금 중이라는 것이다.
개인 자격이든, 법적으로든 간에 이 두 사람을 공개적으로 고발하는 것은 아직은 정치적으로 너무 위험하다고들 한다.

다른 동지들과 같이 “켓”도 당의 기록문이나 회의록에 자주 사용되던 “혁명 이름”인 단 음절의 별명으로 가끔 불렸다.
프놈펜의 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된 당시의 외무부 기록 문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또 옛 동지들이 기억하고 있는 “켓”의 별명은 “뭇”이었으며 외무부에서 급속히 승진하여 올라갔다고 한다.
크메르 루지 지도층의 재판을 위한 증거 수집을 위해 이 문서들은 1995년부터 면밀한 검토에 들어갔던 것이다.
“픽 치엥”은 당시 중국 북경 주재 민주 캄푸치아 대사로 있었다.
그는 지금 북쪽 태국 국경 지방인 “안롱벵”의 한 오두막 같은 목조 집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크메르 루지의 잔학했던 시절 다행히 그는 프놈펜에 있지 않고 중국에서 외교관으로 있었으므로 별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고 얘기도 잘 해 주는 편이었다.
“‘켓’은 외국에 오래 근무했던 경력이 풍부한 지식인으로 외무부와 ‘이엥사리’를 위해 협력하고 또 일을 하였다.
그의 직책으로 보면 매우 실무적인 일을 맡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마음까지는 알 수가 없다.
또 그가 공산당원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의 직책은 낮지 않았으므로 당원이었을 가능성은 높다“ 고 ”픽 치엥“은 말한다.
1976년 4월 시아누크 왕자와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던 캄푸치아 공산당은 당의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당대회를 가졌다.
이 대회에서 캄푸치아 공산당은 시아누크 왕자에게 국가의 최고 통치자 자리를 사임하도록 강요하였고 “켓”의 말에 의하면 그도 장관직에서 해임을 당했다고 한다.
집단 학살 조사를 맡은 수사관도 그가 계속 모든 결정권을 가진 당 고위층의 일원으로 남아있었다는 일부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다.
“켓”과 “호”도 프놈펜에서 일을 했던 다른 귀국자들과 같이 외무부에서 운영을 했던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소위 B-1 수용소에 수용이 되었었다.
(B는 외국인이란 뜻의 크메르어“볼떼”의 이니셜임)
생존자들은 수용소의 생활이 매우 엄하였다고 기억한다.
하루 종일 가축을 돌보고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간에 “켓”이 크메르 루지 체제에서 외무부의 업무를 담당하고 외교정책을 다듬어 갔던 것은 사실이었다.
1976년 5월에 “켓”과 몇몇 동료들은 대표단을 구성하여 베트남과 국경 문제에 관한 매우 심각한 회의를 가졌었다.
회의를 마친 후 이 대표단은 당의 고위층 - 폴폿, 눈체아, 이엥사리, 등에게 보고를 하였다.
결과는 6월에 예정된 베트남과의 정상회담 취소였다.
베트남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그 해 말부터 계속 3년간 캄보디아에 살고있던 베트남 소수민족에 대한 대 학살이 시작되었다.

“켓”과는 어려서부터 친구였던 “숭시콘”이란 자도 프놈펜의 외무부에서 일을 하였지만 장관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그는 지금 태국 국경지대 “말라이” 마을의 한 오두막집에서 살고있다.
“숭시콘”은 “켓”과 같이 외무부에서 주로 “이엥사리” 및 다른 고위층을 위하여 연설문 작성, 문서 기록, 공문서 번역 등을 했다고 술회하였다.
또 대부분의 이 대외 공문서 등은 당시 민주 캄푸치아를 지지하고 있던 국가들에게 보내는 것들이었다고 기억하였다.
그 내용은 지금 악명 높은 크메르 루지의 잔인했던 문구들 즉“적을 때려 부시자” “문제를 제거하자” 등도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적을 때려 부신다는 거 무슨 뜻인지 우리도 알지요.
그 대상은 미국 제국주의자들과 부르주아지 등이었고 문제를 제거한다는 것은 처형한다는 것까지의 뜻은 아닙니다만 누가 그것도 Kill이라고 번역을 했나 봅니다“ 라 하였다.
"숭시콘“은 그가 ”켓“과 같이 정부에서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해 일면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다.
“그 많은 연설문들과 기록문들은 우리가 다 작성 했드랬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또 부정을 했다.
“나처럼 ‘켓’은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나 캄보디아 전문가 “스테판 헤더”교수는 “켓치은”의 임무는 매우 전문적인 행정 관료직에 한정되었었다고 주장한다.
“행정 실무에 밝은 이러한 자들을 당의 고위직까지는 앉히지 않는 것이 민주 캄푸치아의 기본 정책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실무 집단의 한 구성원으로 광범위한 외교문제와 기타 전문적인 업무를 담당했었으며 또 ”이엥사리“는 그를 매우 신임하여 조언을 받아들이고 연설문 작성을 맡겼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오히려 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고 “헤더”교수는 말한다.
“켓”과 “이엥사리”의 관계에 대해서 “숭시콘”은 다른 당시의 동료들과 비슷한 대답을 하였는데, “켓”은 “이엥사리”에게 생명을 빚지고 있었다고 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이 “이엥사리”에게 달려 있다고 했다고 한다.

“호”의 혁명 이름이 최근에야 밝혀졌다.
“벙 뜨라벡”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최근에 그가 “옘”이란 별명으로 불려졌음을 기억해 냈다.
또 “툴스랭”감옥에서 고문으로 죽은 “반피니”가 죽기 전 남긴 진술서에도 그를 “옘”이란 이름으로 진술하였다.
정부 문서 보관소의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옘”이란 이름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이 되었는데 결국 그가 민주 캄푸치아의 결정권을 가진 고위층 집단에는 끼지 못했다는 것이 밝혀지기는 했다.
또 수사관들도 이를 인정하였다.
사실, “호남홍”은 1975년 프놈펜에 도착했을 때에 옛날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다른 귀국자들 거의가 그랬듯이 그도 그때까지 시아누크 왕자를 존경하고 있었으므로 곧바로 정치 재 교육장으로 끌려갔었다.
교육을 마치자 그는 다른 8명의 과거 망명정부 “연합전선”시절의 외교관들과 같이 동부의 수용소로 보내졌다.
“툴스랭” 감옥의 일지를 보면 이들의 대부분을 결국 다시 잡아와서 처형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의 진술서에는 한결같이 그들이 미국 CIA의 사주를 받아 크메르 루지 체제를 전복하려 했었다고 되어있다.
“벙 뜨라벡” 학교에 자리한 귀국자 수용소에 “호남홍”이 도착을 한 것은 1976년 후반이거나 1977년 초로 보인다.
초기에 “폴폿”의 측근들이 이 수용소를 운영할 때는 K-17로 불렀다가 나중 1977년 중-후반에 “이엥사리”가 수용소 관리를 맡은 다음에는 이 수용소는 세 개로 나뉘어져 B-30, B-31, B-32 등으로 명명되었다.
프놈펜에 있던 수용소들은 모두 엄격하여 피교육자들은 외부로 나갈 수가 없었으며 계속 일을 하여야 했고 급식은 아주 소량이었다.
피교육자들은 또 주기적으로 정치적 모임을 가져야 했고 이 모임에서 스스로 또는 간부들에 의하여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그들 중 일부는 사라지기도 했다.
“반피니”의 진술서에는 그가 이 수용소에서 반장을 맡았고 “호”는 부반장을 맡아 보좌하였다고 했다.
이 진술은 다른 생존자들의 말과 일치한다.
그리고 “반피니”가 갑자기 “툴스랭”감옥으로 끌려가자 “호남홍”이 그 후에 반장을 맡았다고 한다.
“반피니”의 진술서에는,
“호송차를 타기 전에 내가 외무부에 일하러 간다고 ‘호남홍’에게 말하였고 그와 연락을 취할 방도를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수용소 관리를 더 철저히 하라고 하였고 군인들이 나를 차안으로 밀쳐 넣어 더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고 되어 있었다.
“툴스랭” 감옥에서는 죄수들로 하여금 친구들에 대한 진술도 요구하였으므로 “반피니”가 “호남홍”에 대한 얘기를 하였을 것이다.
또 그런 제 3자에 대한 진술은 곧 대질이 가능하므로 허위로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반피니”는 다시는 “벙 뜨라벡”수용소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는 1977년 11월 11일 “툴스랭”에서 처형되었다.
“호”가 “벙 뜨라벡” 수용소에서 반장을 하고 있을 때 같이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 하나가 현 정부에 일을 하고 있는데 그는 “호”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싫어했다.
그러나 그는 “반피니”의 실종이 수용소 내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었다는 것을 상기하였다.
“나는 피니 아내의 표정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녀는 창백해지며 몸이 굳어 버린것 같았습니다.
이 때부터 우리는 끌려가는 사람들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수용소에서는 정신적인 고통이 더 커졌으며 철조망 없는 형무소나 같았습니다.
갈 데도 없었고, 돈도 없었고, 시장도 없었습니다.
만약 누가 바깥으로 나가면 바로 사살되었습니다.
크메르 루지의 간부들은 대규모의 집회를 열어 어떤 이의 인민 재판이나 비판을 하며 ‘이자는 X 동지인데 처형을 해야한다’고 하였지요.
얼마 후 그들은 외무부에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는데 그 뜻은 정부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으며 모두 거기에 뽑히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죽음의 위험에서는 한 발짝 더 물러설 수가 있었던 것 때문이지요“.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이 고용 계획을 기억하고 있었다.
민주 캄푸치아의 외무부에 근무를 했었던 한 크메르 루지 관리는 1977년 그가 이 계획을 입안하여 선발자들의 명단을 작성하였다고 했다.
당시에는 “침”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지금은 “삐풋”이라는 본명을 쓰는 이 사람은 1996년까지 크메르 루지에 몸담고 있었으며 지금은 “말라이”마을에서 부 구청장으로 편하게 살고 있다.
그는 “이엥사리”가 사람들을 외무부에 고용시키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명단 작성에 이르자 그는 아무 의심 없이 “호남홍”을 제 1번에 올렸다고 한다.
“외무부의 계획은 ‘호남홍’을 간부로 채용하는 것이었지만 그가 민주 캄푸치아를 신임하고 있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분간 그와 일하면서 그의 충성심을 테스트하기로 하였지요.
그래서 그를 벙 뜨라벡 수용소 소장으로 우선 임명을 했습니다.
나는 ‘호남홍’과 가끔 회의를 했으며 그는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간단한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가 느낀 것과, 의견과, 나쁜 점과 좋은 점 모두 보고를 하였는데 이것이 공산주의자들이 일하는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항상 가상의 적을 발견해 내야 하기 때문이지요“ 라고 “삐풋”은 당시를 회상하였다.
이런 악역을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삐풋”은 “호남홍”과 “이엥사리”를 방어하려 하였다.
그는 외무부가 “벙 뜨라벡”수용소를 담당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더 이상 지식인들의 처형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지식인들의 처형은 오히려 그들 체제를 더 궁지에 몰리게 하였음을 알았다고 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점을 인정하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은 외무부가 수용소를 관리하고 나서도 그 전과 변함없이 지식인들을 계속 처형했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더 공개적으로 처형 대상자들을 골라냈는데 왜냐하면 “벙 뜨라벡”같은 수용소의 보고서 내용보다는 "툴스랭“에 이미 잡혀간 자들의 진술서에 더 상세한 이들의 비밀이 모두 노출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삐 풋“이 얘기하는 ”호남홍“을 위시한 소수의 지식인들은 외무부에 발탁이 되어 크메르 루지 체제하에 십 년이 넘게 있었다가 지금은 파리, 미국, 방콕 등지에서 살고 있거나 또는 캄보디아에서 사실상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살고 있다고 한다.
“호남홍”보다는 낮은 직책으로 일을 했던 수용소 출신의 지식인들은 현 정부 에서도 중견 공무원의 직책에 더러 근무하고 있다.
수용소 생활을 실지로 겪었던 이들은 “삐 풋”과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들의 말은 수용소장 또는 반장의 직책은 단순히 간부들과 피교육자들 간의 업무 연락병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며 간부들이란 검은 파자마 같은 옷을 입은 아직 어리고 전혀 교육을 받지 않은 청소년들이었다고 한다.
지금 집권당인 CPP당에서 사무관이나 차관보(국장급)의 직책에 종사하고 있는 당시의 생존자들은 “호남홍”이 과격한 청소년 간부들로부터 작업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 생존자들의 생각에는 “호”가 “적”을 색출해 내는 정도의 권력은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처형을 당하러 끌려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정치적 장막의 다른 편에는 왕가 쪽 사람들이 또 있었다.
그들이 말문을 터뜨리면 정치적 분위기가 흔들릴 것이라고 한다.
"호“도 그들의 마음속을 잘 알 것이라고 암시하였다.
나중에는 이 왕가 쪽 사람들도 별명을 사용하여 그들의 지난 얘기를 약간씩 바꾸기도 하였고 “호남홍”의 수용소 안에서의 태도에 부응하기도 했다.
현재 노로돔 라나릿드 왕자 밑에 내각 부의장으로 있는 “시소왓 아이라바디”공주는 “호남홍”을 저주한다고 까지 말하며,
“그는 우리들에게 매우 딱딱하게 대했으며 저돌적인 말투로 ‘우리 혁명가들은 너의 왕족들, 상류층 부르주아지들은 인민들이 왕정 치하에서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라고 했다.
“호남홍”이 그냥 단순히 거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학살에 책임이 있는지에 대해서 이 공주는 “그는 모호한 성격을 가졌는데 그가 혁명 조직에 무어라고 보고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자와 그 가족들이 곤란한 처지를 피해 나가기 위하여 발악을 했었다는 것입니다"라고만 말하였다.
“아이라바디”공주는 “벙 뜨라벡” 수용소에 끌려오기 직전인 1977년에 어린 아들을 잃었었다.
“우리는 이 자를 여러 체제를 거쳐온, 여러 계절을 살아 온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 체제가 만약 붕괴된다하더라도 ‘호남홍’은 그대로 살아 남아 있을 것이며 다음 체제에도 고위직을 맡을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짓도 할 것입니다.
그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것이냐? 라고 내가 물었지요.
그의 대답은 살기 위해서는 무슨 대가라도 치르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그의 대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을 겁니다.
아마 그자 자신과 그가 믿는 신만이 그 비밀을 알고 있겠지요“
공주의 원망 서린 대답이었다.
“호남홍”이 비록 1년 이상을 혁명가의 가명으로 “벙 뜨라벡”수용소 소장직을 지냈지만 민주 캄푸치아로부터 어떤 특혜적인 대우를 받지는 못한 것 같다.
1979년 공산 베트남군이 민주 캄푸치아를 축출하고 프놈펜에 진군하기 며칠전에 “호”와 몇몇 수용소 피교육자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다.
외무부에서 일을 하던 다른 사람들은 더러는 배를 타고 해외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호”는 “삐풋”을 따라 도망을 하여 바탐방의 한 마을에 피신을 하였고 가족들은 태국으로 피난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남아서 체제를 고수하겠다고 하였다.
“삐풋”을 따라 밀림으로 들어가 게릴라 활동을 하겠다고 했으나 “삐 풋”은 “호”가 군인이 아니고 민간인이므로 따라오지 말고 가족이나 돌보라고 했다고도 한다.
2개월 뒤 베트남군이 이 마을까지 진군하였다.
그러나 “호”는 운이 좋아 과거를 감출 수 있었고 더군다나 그가 지식인이라는 것을 베트남군이 알게되자 그더러 프놈펜에 와서 정부의 일을 도와달라고 까지 하게 된다.
이것이 그가 색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 것이다.
“삐풋”은 그 이후 한번도 “호”를 만나지 못했지만 이름은 더러 들을 수 있었는데 아마 자신을 잊어 버렸을지도 모르지만 “벙 뜨라벡” 수용소의 이야기를 꺼내면 자신을 알아차릴 것이라고 했다.

“켓치은”은 피난선을 탈 수 있을 정도로 민첩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에도 몇 년을 계속 크메르 루지를 위해서 일을 했는데 축출 이후에는 오히려 “폴폿”의 측근에서 일을 했다.
그는 망명 의회의 의원 자격으로 일을 하며 외무부의 주요한 임무는 체제의 부활을 도모하는 것이었으므로 “켓”의 전문적인 행정 업무력은 많은 일을 맡아야 했다.
몇 년 뒤인 1983년에 “켓”은 프랑스 외교관의 도움으로 크메르 루지를 이탈할 수 있었다.
그 이후 그는 1988년까지 프랑스 회사에서 일을 하였으며 1992년까지는 유엔 단체에 소속되어 아프리카에서 근무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2-1993년 사이에 귀국을 하여 캄보디아 정부 고문으로 일을 하였고 1994년에는 드디어 삼랑시의 뒤를 이어 저 대단한 위치인 재무부 장관이 된 것이었다.
크메르 루지 시절 “켓”의 동료이면서 지금은 숲속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인 소펩”은 그가 대단한 처세술을 가진 자라고 부러워하면서 그 비결은 충성심과 현실주의의 완벽한 배합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는 그는 시아누크 왕자 밑에서 일할 때는 시아누크를 섬기었고 크메르 루지와 일할 때는 민주 캄푸치아에 충성을 다 하였고 지금 CPP당에서 일할 때는 적어도 다음 세상이 올 때까지는 충성을 바칠 것이라고 했다.

“켓”은 1975-1979년 사이 크메르 루지 통치 시절에 그가 장관을 지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모함이라고 하며 크메르 루지 축출 이후에는 그가 크메르 루지에게 이용만 당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의원 명단에 들어 있는 것도 크메르 루지들이 자기를 이용하기 위해 이름을 넣은 것이지 자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더욱이 모든 문서에도 공식적으로 자기가 의원으로 지명되었다는 근거가 없다고 하였다.
그가 외무부에 근무할 때 주로 연설문과 공문서의 작성 및 번역을 했다고 하며 주기적으로 이엥사리와 만났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가 집단 학살에 대해서 또는 그러한 정책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했다.
그들은 자신을 항아리 속에 가두어 둔 것과 같았다고 주장하였다.
“호남홍”이 정부에 제출한 이력서에는 그가 “벙 뜨라벡” 수용소에서 포로로 노동을 하였다고 만 되어 있다.
물론 크메르 루지 고위층과는 전혀 접촉한 일이 없다고 한다.
1999년에 호남홍과 켓치은은 국가적인 주권 문제를 앞세워 크메르 루지 재판은 국내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유엔에 주장하였다.
또 그 예로 “르완다” 및 “발칸”반도에서 있은 범죄 재판을 들었다.
프놈펜의 외교가에서는 크메르 루지 범죄 재판에 대해 적어도 6명의 혐의자들- 이엥사리, 눈체아, 키우삼판, 타목, 둑크, 케팍 등의 재판이 진행이 되면 새로운 이름들과 새로운 증거들이 노출될 것이며 그러면 2차 재판이 열릴 가능성이 많다고 보고 있다.
이 혐의자들은 결국 캄푸치아 공산당의 비밀 조직을 만든 사람들이 소위 “주역”으로 보지만 사실 “툴스랭”감옥의 책임자였던 “둑크”같은 자는 그런 당 중앙부에 가까이 가보지도 않은 자였다.
그러나 혐의는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자인 것이다.

물론 1차 재판이 끝나려면 수년이 걸릴 것이지만 그 이후에는 새로운 이름이 많이 노출 될 것이다.
아마 “호”와 “켓”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또 그러한 일이 현 정부가 매우 우려하고 있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호남홍과 시아누크 왕자와의 관계

1975년부터 1979년 사이 호남홍의 행적에 관한 공개적인 고발은 시아누크 왕자가 주도하였다.
이 고발은 2년간 프랑스 법정에 게류 중에 있다가 1991년 시아누크 왕자가 캄보디아로 귀국을 한 뒤에 평화적으로 해결이 되었는데 시작은 1989년 파리에서 연립 망명정부 대표인 시아누크 왕자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수상 훈센간에 평화협정이 시작되자 시아누크 왕자는 호남홍을 악랄한 범죄자라고 하며 그가 크메르 루지 집단 수용소의 지휘자였고 살인자라고 몰아붙였다.
이 사건은 결국 프랑스 신문에 대서 특필 되었고 호남홍도 시아누크 왕자를 명예훼손으로 고발을 하게 된다.
시아누크 왕자를 수행했던 두 사람, 아이라바디 공주와 께오 분 톡은 나중에 벙 뜨라벡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들과 호남홍의 행위에 대한 진술을 남겼다.
이 수용소야 말로 외국에서 귀국한 지식인들을 가두어 놓고 하나씩 처형을 해 갔던 수용소인 것이다.
이들의 진술서에는 호남홍이 처형할, 소위 크메르 루지의 적인 사람들의 이름을 대었다고 하며 호남홍은 반대로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 중 그가 무고하다는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 대항하였다.
결국 시아누크 왕자는 법정에 출두하지 않아 호남홍이 원고 불 출석과 증거 불충분으로 프랑스 법정에서 승소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1991년 자카르타에서 열린 평화 회담에서 호남홍이 시아누크에게 사과를 함으로써 실질적인 두 사람간의 문제는 일단락이 되었다.
평화 회담이 맺어지고 1991년 후반에 시아누크가 프놈펜으로 귀국을 하자 훈센과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악수를 하고 그 중간에 살이 잘 오른 호남홍이 웃으며 서있는 모습이 신문에 게재되기도 했다.

다른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시아누크도 많은 가족을 잃었는데 시아누크의 두 번째 아내인 퐁산노미 공주에서 태어난 라비봉 왕자는 1973년(29세)에, 소리야 롱시 공주는 1976년(29세)에, 케마노락 공주는 1975년(26세)에, 보툼 보파 공주는 1976년(25세)에, 그리고 세 번째 아내 모니케슨 공주에서 태어난 나라디포 왕자는 1975년(29세)에, 또 다섯 번째 아내 마니반에서 태어난 수자타 공주는 1976년(23세)에 모두 죽었는데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크메르 루지와 론놀 정권의 책임이 있는 것이며 결국 시아누크는 론놀과 크메르 루지 시대의 전란에 6명의 젊은 자녀를 잃은 것이다.

벙 뜨라벡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들

목 마렛 (CPP): 환경부 장관
쳄 위디야 (CPP): 외무부 상임 사무관
롱 비사로 (CPP): 외무부 차관보
호 소툰 (CPP): 외무부 근무
막 소피 (Fun): 지방 개발부 차관보
께오 분 톡 (Fun): 상원 의원
시소왓 아이라바디 공주(Fun): 라나릿드 내각 부의장
판 핀 (CPP): 우편 통신부 차관보
텝 부타 (CPP): 국무회의 산업국 국장
삼렛 펙 (CPP): 국회의원


동부지역 출신들

호남홍과 켓치은만이 크메르 루지의 이력을 가진 현직 정부의 고관은 아니다.
크메르 루지군의 동부 군은 콤퐁참과 쁘레이벵 및 스베이링 등을 관할하는 군으로 현 수상 훈센을 위시한 많은 주요 고관들이 몸담았던 軍이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1977년경에 크메르 루지를 이탈, 베트남으로 망명했다가 1979년 다시 베트남군을 앞세우고 들어와 크메르 루지를 축출했던 주역들이다.
이 지역은 어떤 의미에서는 폴폿의 골칫거리였는데 프놈펜 함락 전인 1975년에 벌써 이 동부지역 군대 지휘관들은 서부지역 군대의 타목과 분규를 일으키고 있었다.
또 복장도 지시된 검은 옷을 입지 않고 자유 복장을 고수하였었다.

체아 심 : 상원의장, CPP 총재, 20 지역 당 서기, 1978년 5월 이탈.
훈 센 : 수상, CPP 부총재, 21 지역 대대장 출신, 1977 6월 이탈.
행 삼린 : 전 수상, 국회 부의장, CPP 명예 총재, 동부지역 참모장,
1978년 5월 이탈.
맛 리 : 국회의원, CPP 상임위원, 지역 간부, 1978년 5월 이탈.
멘 삼안 : 국회의원, CPP상임위원, 본부 요원, DK초기에 베트남으로 탈출.
폴 사룬 : 국군 부사령관, CPP상임위원, 1978년 숙청으로 탈출.
욱 분 치은 : CPP 본부위원, 부사무관, 21지역, 1978년 5월 숙청으로 탈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