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서
복수 정당과 언론, 표현의 자유는 아직 인정하지 않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집을 새로 짓고 가족들과 같이 입에 풀칠하기에 바빴으므로
그런데 정신을 쓸 겨를도 없었다.
민주 캄푸치아와 비교해 보는 국민들에게는 너무도 큰 차이가 나는, 신나는 일들이었다.
더러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이 체제가 싫으면 언제라도 태국의 난민촌으로 갈 수 있었고 또 거기서 미국, 프랑스, 호주 등 외국으로
망명을 한 사람들도 삼십만이 넘었다.
일부 크메르 루지도 몰래 섞여 망명을 갔으며 캄보디아인으로 위장한 태국인들도 그 중에 많이 섞여있었다.
일부는 또 베트남의 식민지가 된 것이 자존심이 상해서 떠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캄보디아를 다시 재건하기 위하여 자존심을
누르고 베트남의 관리들과 같이 협력하기도 했다.
신 정부는 소련의 원조를 받기 시작했고 또 인도의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여전히 가난을 헤어나지 못했다.
화폐가 없으니 수상의 월급이 월남쌀 10kg과 옥수수 6kg, 그리고 누런 소련제 빨래비누 한 덩어리였다.
도망간 크메르 루지가 계속 UN의석을 망명 연합정부랍시고 시아누크를 앞세워 차지하고 있었으니 신 정부는 외국의, 또 국제사회의
원조를 받기가 매우 어려웠다.
공산 베트남에게 패하고 철수한 미국은 앙금이 깊어서 중국과 아세안 국가들이 크메르 루지를 지원하는 것(13억 달러이상)을 묵인하였고
사실 베트남 좀 때려달라고 태국을 통하여 크메르 루지에게 지원도 하였다.
폴폿이 국경근처 태국 땅(남쪽 해안도시 뜨랏)의 비밀 기지에 있는 것이 1979년 말이 되어서야 우연히 사진으로 노출되었다.
폴폿은 여기서 1980년까지 지냈다.
이 아지트는 87호 기지라고 불렀는데 과거의 당중앙위원회를 지칭한 암호 870을 따른 것이었다.
때때로 폴폿은 기지를 캄보디아 영내로도 옮겼다.
이 기지에서 그는 민주 캄푸치아의 재건을 지휘하였던 것이다.
1979년 말이 가까워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약 10여만 명의 크메르 루지 -그 중 반은 전투원이나 지원부대원인- 가 태국으로
넘어와서는 다른 난민들과 같이 난민촌을 형성하여 지내고 있었다.
1980년 중반에는 이들이 서서히 난민촌을 장악하기 시작하여 다시 엄격한 난민촌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는데 꼭 6.25 당시 거제
포로 수용소 같은 흐름이었다.
다른 난민촌에서는 적어도 30여만 명이 망명허가를 받아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외국으로 떠날 수가 있었다.
1990년에도 비슷한 숫자의 난민들이 모여들었지만 막차를 타 버려서 더 이상의 외국 망명은 허가가 나지 않았다.
크메르 루지가 장악한 난민촌에는 아예 망명 인터뷰도 하지 못하게 했고 심지어 캠프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했다.
폴폿이 태국 국경에 숨어 지내는 것이 과거 1963-1965년 사이 베트남 국경에 숨어 지내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양쪽의 경우 모두 그는 외세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당간부들이 수시로 그를 찾아와 지시를 받고 갔다.
단지 1963년도에는 100호 기지에서 20여 명의 졸개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16년 후인 지금은 적어도 민간인 합하여 10여만
명의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과 과거에는 전쟁 중에 있던 베트남의 인질로 있었지만 이제는 막강한 강국들 - 중국, 태국,
아세안 회원국 그리고 미국의 지원까지도 받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나라들이 폴폿의 국제급 비인도적 범죄를 알고도 도와준 것은 한결같이 공산 베트남을 미워했기 때문이었다.
1979년 1월 프놈펜이 베트남의 손에 떨어지고 2주가 되었을 때 가능한 베트남군의 태국 침공에 겁을 먹은 태국은 중국과 모종의
합의를 보았다.
만약 중국이 태국 내의 공산당에게 무기 지원을 중지한다면 대신 중국이 태국 땅을 경유하여 크메르 루지에게 무기를 공급할 수 있게
해 주고 또 태국도 크메르 루지가 살 수 있게 국경에 가까운 태국 땅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중국과 새로이 탁구(핑퐁) 외교를 전개하고 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우호적인 분위기로 흐르던 미국은 짐짓 이러한
합의를 모르는 체 했으며 더 나아가 민주 캄푸치아의 UN 의석 고수를 지지하여 주었다.
그럼으로써 미국은 중국의 비위도 맞추고 또 워싱턴 정치인들이 애써 주장하듯 미국 내의 고조된 반 베트남 분위기가 계속 유지되게
하였다.
아세안 가입국들을 포함하여 미국 또는 중국과 동맹관계를 가진 국가들은 이 강대국의 세력 뒤에서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80년 중반에 크메르 루지가 장악하고 있던 오합지졸의 난민촌은 망명 정부의 형태를 가꾸기 시작하고 패잔병 무리들은 중국제
무기로 다시 전투부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 때 벌써 수억 달러 어치의 소병기와 중화기, 탄약, 지뢰, 중공군 모자와 의복 및 기타 군수품들이 중국으로부터 보급이 되었던
것이다.
폴폿은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우방국의 지원과 자신의 신변 안전만 유지되면 다시 군사를 일으켜서 추종자들을 모으고 권력을 재탈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영토도 없는 상황에서 외국의 원조를 거절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나 같으니 그는 생존의 기회를 위하여 단독 통솔도 포기하였다.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을 축출하는 것이 그와 우방 지원국들의 공통적인 관심사라면 그 상황하에서 단독 통치권을 양보하는 것이 그리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민주 캄푸치아 분석
캄보디아 말에 유창한 프랑스 신부 프랑소아 폰차드가 난민들의 얘기를 분석하고 크메르 루지 방송을 녹음하기 시작한 1977년부터
민주 캄푸치아의 잔악 무도함이 뉴스를 타고 외부로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가 쓴 책 "캄보디아 0년"은 많은 이들의 호평을 받았지만 일부에서는 미국의 반공주의를 너무 의식한 것 같다는
비평도 하였다.
그러나 1979년 이후에, 그가 쓴 책의 내용이 거의가 맞았다는 것이 확인이 되기 시작했으며 캄보디아가 평화롭고, 아름답고 한적한
곳으로 알고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곳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1979년이 다 가기 전에 행삼린의 캄보디아 인민 공화국(PRK)은 S-21 취조실을 툴스랭 박물관으로 만들었는데 1980년에는
발견된 진술서 중 하나가 서방 학자에 의해 번역, 공개되자 극소수의 폴폿 지지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이제 민주 캄푸치아는 소수에게만
득을 주고 수백만을 희생시킨 실패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랜 내전으로 이미 황폐해 버린 국토 위에 또 폴폿 체제가 캄보디아 사회를 잘 못 분석하고, 몽상적인 정책을 펴고, 국민들을
경멸하고, 산업기술은 엉망이고, 수단은 잔인했으니 결국 나라를 파멸의 구렁텅이에 집어넣고 만 것이었다.
도대체 억울하게 죽은 생명이 얼마나 되는가? 가장 줄여서 생각해도(폴폿의 의견대로) 남녀노소를 합하여 1975-1979년 사이에
80만명(10명에 1명) 또는 키우삼판의 생각대로 1백만 명(8명에 1명)이나 고귀한 목숨을 잃은 것은 확실하다.
이 숫자는 론놀 정권과의 5년을 끈 내전 기간이나 또 대 베트남 전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아예 고려하지도 않은 것이었다.
대부분의 죽음은 영양실조, 과로, 질병 등의 원인이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한 원인 규명은 결국 체제가 밀어붙인 폭풍 같은 돌격 정책이나, 배우지 못한 철없는 어린아이 당원들에게 생사를
좌우하는 권한을 준 것이나, 그러한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하지 않은 것이나, 당의 지도부가 좌우한 근거 없는 음모와 배반에 대한
판단 등으로 볼 수가 있다.
또, 적어도 10만여 명 이상의 남녀가 심문 없이 처형당했다.
특히 지방에서는 어린 당원들 생각에 혁명의 방침이라고 생각되면 마치 잡은 개구리를 아무 생각 없이 찢어 버리듯이 주저 없이 살인을
저질렀다.
그 뿐 아니라 대부분의 즉결 처형은 과잉반응이나 즉흥적인 것도 많았다.
다른 2만여 명이 또 S-21에 끌려가서 긴 고통을 받으며 서서히 죽어갔다.
때로는 수개월간을 고문하며 그들 표현대로 인간을-smash-박살내었던 것이다.
당연히 폴폿은 S-21을 알고 있었고 직접 통제하였을 것이다.
또 지방에서의 영양 실조, 즉결 처형, 극악한 환경 등도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폴폿은 그 자신을 전쟁 영웅으로 생각했었으니 이러한 고통받는 사람들이 정말로 죽어가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없었는지 아니면 알려고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대신 그는 1975년부터 자신과 한 몸인 당이 이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결정했던가 아니면 아예 희생자들을 당의 적으로
간주했던가 했을 것이다.
피해자들을 인간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불필요한 한 계층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또 폴폿은 혁명을 반역한 베트남인들과 캄보디아 육신에 베트남 정신상태를 가진 그 첩자들은 민주 캄푸치아의 잉여인간들이라고
비난하였다.
기자들이 민주 캄푸치아의 정책으로 희생된 희생자들의 숫자에 언급을 하면 그는 피했고 단지 수백 명 정도일 것이라고 또 어떤 때는
수천 명 정도라고 얼버무렸다.
1979년 8월에 행삼린이 이끄는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은 결석 재판으로 폴폿과 이엥사리를 흉악범으로 기소하고 뚜렷하고 충분한
증거를 들어 사형을 언도하였다.
후에는 또 국제 인권 활동가들이 네덜란드에 있는 국제사법 법정에서 폴폿의 재판을 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은 실패하고 말았는데 첫째, 태국이 폴폿의 신병을 인도하지 않으려 했고 또 미국과 중국은 베트남을 처벌하는데 더 관심이
컸지 당분간 필요한 폴폿을 처벌하는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일단 한동안 그는 메스콤을 탔다.
어떤 언론가는 그를 대학살 독재자라고 하며 히틀러에 비유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대학살 공산주의자라고 하며 스탈린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때까지도 지지자들을 갖고 있었다.
남아있던 그의 간부들과 전사들에게는 그는 잘 못 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북경의 지도층은 그를 민족주의자, 동맹자 그리고 혁명가로 평가하였다.
태국은 그를 협조자로 보았고 베트남을 막아주는 능숙한 군사전략가로 보았다.
폴폿이 집권하고 있던 기간에 대한 악성 정보가 연기처럼 세계로 번지기 시작하자 당황한 것은 후원자 미국이었다.
그러나 베트남 악몽에 시달리던 미국은 폴폿을 단념해 버리는 용기가 부족했다.
또 '킬링필드' 영화는 폴폿 체제의 잔악함을 세계에 알리는데 큰 몫을 했는데 수년전 주인공인 행 박사를 암살한 것도 난민으로
미국 망명에 끼인 크메르 루지가 사주를 받아 저지른 소행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은 폐
1981년, 폴폿에 대한 세계의 부정적인 반응이 커지고 비 공산주의 캄보디아 난민들 사이에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하며 또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주둔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자 미국과 그 우방국들은 UN에서 크메르 루지의 존재를 은폐하거나 또는 대치할 수
있는 반 베트남 연합정부의 구성을 모색하면서 또 한편 비 공산주의 색채의 반 베트남 저항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막후 공작의 첫 시도로 12월에 캄푸치아 공산당의 중앙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당을 해산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그러나 당원의 그 아무도 숙청되거나 자리를 내 놓은 사람이 없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외국에 보이기 위한 숨바꼭질 눈가림이었던 것이다.
정말로 새로운 정당에는 과거의 공산당원들이 그대로 승계하여 1984년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 한참 후인 1989년
탈주자들의 증언이었다.
새로운 연합정부는 1982년 중반에 조각(組閣)이 되었다.
내각에는 민주 캄푸치아 사람들이 그대로 자리 잡았는데 당연히 민주캄푸치아의 후원자들과 '용감한' 군부들 때문이었다.
연합정부의 다른 참가 단체들은 대부분 북경에서 지내고 있던 시아누크 파와 혁명 이전에 한 때 수상을 지냈던, 역시 주로 프랑스에서
살고 있었던 손산 파였다.
이 두 비 공산주의 파들은 태국에 있던 난민들과 서방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외무부의 구성원들은 거의가 민주 캄푸치아 출신들이 장악했는데 외무부가 바로 망명 연합정부의 가장 중요한 주체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외교문제는 UN 주재 대표들에게 맡겨 두었다.
또 폴폿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고 있었던 키우삼판이 1979년 말부터 폴폿의 뒤를 이어 수상이 되었고 1975-1979 사이
S-21의 실질적인 직속 책임자였던 손센과 같이 연합정부의 대변인 노릇을 했다.
삼판은 새로이 시작한 자본주의 경제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면서 과거 자신은 자신의 의지와는 반하는 행위를 민주 캄푸치아로부터 강요당했었다고
변명을 하였다.
이러한 변명은 민주 캄푸치아의 체면을 살리려는 자들에게는 반가운 말이었는지 몰라도 폴폿, 이엥사리 등과 오래고 지속적이었던 밀착이나
또 숙청에 관계했던 것들로 인해 결코 설득력 있는 변명이 될 수는 없었다.
우기철인 4월부터 10월 사이에는 베트남군의 차량이나 장갑차들이 뻘 속에서 기동을 할 수 없으므로 폴폿 휘하의 군대는 집요한
공격을 하였다.
크메르 루지 출신의 군대는 시아누크나 손산 휘하의 군대보다 더 전투력이 우세하였고 또 무장도 잘 되어 있었으며 전의(戰意)도
확실히 강했다.
그렇지만 1990년까지도 이들은 캄보디아 영내의 어느 일부분도 장기 점령을 하지 못하고 쳐들어갔다가는 베트남군과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에 의하여 곧 쫓겨나고 말았다.
이들의 무기는 태국의 협조에 의하여 중국의 것을 계속 공급받을 수 있었고 재정적 지원은 태국, 중국 및 심지어 미국으로부터도
받고 있었다.
또 UN 난민 위원회는 태국영내의 난민촌을 서로 연결하여 국경선을 따라 캄보디아 내의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수 있게 해 주었으므로
자연히 크메르 루지에게도 충분한 식량이 보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난민촌들은 이 당시부터 크메르 루지의 장악 하에 있었고 수송인력은 모두 크메르 루지 군인들이었다.
후회
1979년 12월 폴폿은 일본, 스웨덴, 중국 및 미국에서 온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였다.
가장 폭 넓게 인터뷰를 한 것은 4명의 일본 기자들이었는데 캄보디아 쪽 기지에서 이틀간 진행되었었다.
시종일관 그는 웃는 표정이었으며 그가 캄보디아에서 쫓겨 나왔다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캄보디아에는 5만 명이 넘는 전사들이 그물처럼
배치되어 전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 들이 최근 역시 약 5만여 명의 베트남군들을 섬멸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집권 중에 있었던 학살 행위에 대해 질문을 하자 폴폿은 "인민들을 잘 살게 하려는 정책의 집행과정에서 수천 명 정도가
죽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베트남군들이 백만이 넘는 사람들을 죽여 놓고는 자기한테 뒤집어씌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1976년에서 1978년 사이에 정부를 전복하려던 6번의 쿠데타가 있었다고 하면서 만약 그 주모자들을 처형했었다면 수천 명이
죽었을 수가 있다고 하며 실지로 처형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말을 남겼다.
단지 집권 중에 그가 실책한 것이 있었다면 화폐제도를 없애버린 것이라고 하면서 너무 강력한 정책이었었다고 후회했다.
이 자리에서 또 그가 과거의 사롯사였다는 것을 처음 본인의 입으로 실토를 했다.
며칠 뒤 폴폿은 미국의 ABC TV 기자들과 인터뷰를 가졌는데 폴폿은 또 이 기회에 미국에게 베트남군을 캄보디아에서 몰아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베트남군이 대학살 전쟁을 하고있다고 기자들을 설득하려 했다.
또 대화 중에 베트남군들은 히틀러보다도 더 악독하다고 비유하면서 히틀러는 유태인과 그에게 반대하는 자들만 죽였지만 베트남군들은
반대하는 자 뿐만 아니라 동조하지 않는 선량한 사람들까지 모두 죽이고 있다고 폭로했다.
인터뷰들이 있고 얼마 지나서 민주 캄푸치아 방송은 폴폿이 수상직을 사임하고 키우삼판이 새 수상으로 취임하였다는 방송을 하였다.
수상을 사임한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들에 대한 국민정서 문제를 고려하여 필요하다고 분석했던 것 같다.
지탄받는 폴폿을 계속 앞장세우기에는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 적어도 1년간은 더 이상 인터뷰를 거절했는데 1990년에 미국의 다른 TV 방송국이 이들과 친한 한 태국 사람을
중간에 넣어 인터뷰를 해 주면 30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 때 잠시를 제외하고 이후 10년을 폴폿은 잠시도 권력을 놓지 않고 배후에서 통제를 하는 철저함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후일의 증언들로 나타나기도 했던 것이다.
당시 폴폿의 한 측근이 '프놈말라이'에서 폴폿의 얘기를 증언한 것을 보면, 많은 국민들이 그를 원망하고 있고 학살의 책임이
또 자신한테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죽은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대목에서 그는 허탈감을 보이며 또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그는 그 책임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사실 현장은 너무 멀었고 그 자신이 그러한 행위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치 그는 집안의 아버지로 아이들의 행동을 감독하지 못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아이들을 너무 믿었기 때문이다. 예로써 침사막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중앙 위원회 일을 맡겼고 사반에게는 지식인들을 다스리는 일을 맡겼고 사오핌에게는 정치교육을 맡겼는데 ... 이들은
모두 그와 아주 친한 사이들이었으므로 전적으로 믿었던 동지들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들이 모두 망쳐버렸다. ... 이들은 진실이
아닌 것을 보고했고 모든 것이 잘 되갑니다 라고 하면서 이놈이 나쁩니다 저놈이 반동입니다 라고 했는데 결국 이들이야말로 반역자들이었던
것이다. 치명적인 과오는 베트남에 의해 길러진 간부들이었다... 라고 했다고 한다.
정말 프로다운 대단한 연기였다.
듣는 간부들을 설득하려는 듯 폴폿은 눈물을 글썽이며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정치에서 손을 떼거나, 또 다른 간부들에게 사임을
하라고 권고하기에는 너무 때가 늦었던 것이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데에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 같았지만 통치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희생양이었었다고
믿는데는 변함이 없었다.
그의 단순함, 고정관념 또는 부적격 등 때문에 많은 생명이 죽었다는 사실조차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거나 또는 반성을 하게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쉽게 배신을 했느냐? 고 반문하였다고 한다.
더 나아가 진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고 억울해하는 대목에서는 그 자신의 인생 행로에 기본이었던 진실을 잘(?)다루는 전법을 생각해
볼 때 용납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또 1953 - 1954년 사이에 월맹군과 같이 대 프랑스전의 최전선에 참가했던 사람들과 또 1960년대에 월맹군에게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베트남에 의해 길러진 간부 운운하며 치명적인 과오였다고 하는 것은 무의식중의 실언이었던 것이다.
폴폿의 다른 모든 연설과 같이 이 '후회의 고백' 연설도 결국 목적의식이 뚜렷하였는데 듣는 이들이 더 당에 충실하고 자신에게
충성할 수 있게 하며 또 그의 궤변(詭辯)을 믿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이었다.
듣는 이들 중 하나는 얼마나 세뇌가 되었던지 후일에도 폴폿이 참 자상해 보였고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대해 주었다고 증언했다.
다시 옛 날로 거슬러 올라가 젊은 시절 그가 받들었던 토사뭇, 티은뭄 그리고 끄반시판 선생 같은 타입의 처세를 폴폿이 그대로
흉내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원로들의 처세는 혼자 환성을 받고 조명을 받으려던 당시 관료주의적인 공직자들의 처세와는 너무
달랐던 것이었다.
잠 적
1981년부터 1986년 사이에는 폴폿의 연설이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사진이나 일화 한 토막도 구할 수 없었다.
1985년에 그가 심하게 아파서 북경의 병원에 입원하고 있다는 뜬소문이 방콕 등지에서 퍼진 것 이외에는 대부분 삼엄한 경비 속에
87호 기지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87호 기지에서 그는 주로 군대를 정규군 형태에서 게릴라 형태로 개편하는 일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치적인 승산이 있어 다시
정규군 형태로 중무장을 하기 전에는 필수적인 조치였을 것이다.
1985년까지도 그는 군의 통수권 자였었는데 그 해에 수상을 사임하고는 갑자기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국가 방위 최고 연구소의
소장이라고 했다.
그리고 항상 막후에서 크메르 루지 정치군사 조직의 고문역할을 했다.
그가 보이지 않게 되자 적과 반대자들은 꼭 홍길동이나 도깨비를 연상하듯 캄보디아 전통 문학 속에 나오는 신출귀몰하는 영웅을 연상하여
섬뜩하기도 했고 또 어리둥절하기도 했던 것이다.
비록 많은 베트남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또 행삼린 - 훈센 정권이 있었지만 1980년대 전반에 걸쳐서 20세가 넘은 캄보디아
사람들은 거의 크메르 루지가 다시 권력을 잡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이러한 "폴폿 공포"의 출현은 갑작스런 소란이나 야간에 마을을 노략질하는 게릴라 무리의 출현, 그리고 수시로
밟아 터지는 지뢰에서 나타났다.
수십만 개의 사과 만한 크기의 중국제 지뢰는 크메르 루지뿐만 아니라 연합정부를 구성한 다른 -시아누크와 손산- 군대에 의해서도
캄보디아 전국에 특히 논과, 시장과 마을의 사람들이 잘 다니는 곳에 무분별하게 뿌려져 버린 것이다.
이 對人지뢰는 3-5cm 정도 땅 밑에 간단히 묻을 수가 있었는데 약간의 중량이 가해지면 뇌관이 작동하여 중량이 없어지는 순간에
폭발하게 되어 있었다.
희생자들이 들을 수 있는 소리는 '크릭'하는 소리뿐이었는데 이 지뢰 살포는 수 많은 폴폿의 적들, -군인, 농부, 여자, 어린이-
들이 죽고 불구가 되었다.
그는 이 지뢰살포를 베트남군을 노린 것이었다고 말하지만 동조하지 않는 무고한 양민들도 결국 그에게는 적이나 같았던 것이다.
부녀자를 가리지 않고 자기 동포를 살상할 수 있는 마음은 크메르 루지뿐만 아니라 시아누크 휘하의 왕실 군대도 같았다.
언젠가 시아누크는 크메르인들은 기본적으로 잔인한 성격을 가졌다고 했는데 결국 그 말은 자신도 포함한 얘기였던 것이다.
1990 - 1991년 사이에는 일주일에 평균 80명이 지뢰를 밟았고 다행히 죽지 않고 부상한자들 -일찍 발견된 자들-은 열악한,
그나마 극히 부족한 병원에서 되는대로 치료를 받았다.
쫓겨간 폴폿의 가해(加害)는 변함없었던 것이다.
한편 개인 사생활에도 세 가지의 큰 변화가 있었는데 아내 키우뽄나리가 극심한 신경쇠약으로 인해 북경의 병원에 입원하였으며 1987년에는
뽄나리의 동의를 얻어 다시 재혼한 사실이었다.
새 아내는 30대 초반으로 빈농 출신이었고 이름은 사롯사처럼 사-(희다는 뜻)였다.
1988년 새 아내는 환갑이 넘은 폴폿의 첫 아이로 딸을 낳았다.
이 신혼 가족은 87호 기지에서 생활했으며 탈주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폴폿은 늦둥이 딸아이에 흠뻑 빠져서 당간부들의 교육장에도
딸을 안고 다녔다고 한다.
변 명
폴폿을 둘러싼 장막이 1988년에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는데 1986년 12월에 작성된 39쪽 분량의 기밀문서가 첩자의 손을
거쳐 방콕의 미 대사관으로 흘러 들어왔다.
내용은 당간부들에게 지시한 것들로 민주 캄푸치아의 역사, 승리와 실책의 분석 등이었다.
내용의 흐름이나 색채는 폴폿이 작성했음이 완연했다.
문서의 수사적(修辭的) 형태는 또 당 대회 때의 주제였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민주캄푸치아의 역사에 대한 폴폿의 정의에는 몇 가지 놀라운 내용이 있었는데 (또 黨이라는 말은 절대로 쓰지 않았다) 웅변적인
표현력과 음모가 가득 도사린 마음, 그리고 실책에 대한 합리화 주장 등은 흥미로운 것들이라 할 수 있었다.
내용의 대부분은 다른 자들의 관념을 공격하는 것이었는데 이 다른 자들을 지명하지는 않았지만 연합정부 내의 비 공산주의자들(시아누크,
손산)과 민주 캄푸치아의 비인도적 학대 행위를 물고 늘어지는 외세를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1986년에 연합정부 내의 비 공산주의 파들은 해외의 캄보디아 교민들과 태국의 난민촌에 있는 국민들로부터 많은 동조를 받고 있었다.
폴폿은 이러한 사태의 진전에 대해 간부들에게 경고를 하였다.
여기서 다른 자들이란 민주캄푸치아에 대해 치명적인 악선전을 하고 있는 단체와, 민주캄푸치아의 지도층을 공격하거나, 심지어 폴폿의
축출을 주장하는 단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런 단체들은 시아누크나 손산에 대해서는 한번도 그러한 비평을 한 일이 없었다.
이러한 여론은 크메르 루지가 포섭하려던 다른 캄보디아 단체들로부터 지지를 얻는데 있어 막대한 방해가 되었다.
폴폿은 당간부들에게 정신적 무장을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고 그래야 베트남군과 다른 자들을 쳐부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그럼으로써 당간부들이 정치적, 사상적 전투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가 있다고도 하였다.
문구의 어디에도 연합정부가 정치단체로 존립할 수 있다는 말은 없었다.
물론 연합정부의 다른 단체들은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모든 "다른"것들은 다 그랬듯이.
연합전선 전술에 대한 폴폿의 해석은 뻣뻣했고 냉소적이었다.
캄보디아 민족의 보호를 위해 내세운 정치적 슬로건인 국가, 민주주의, 진보에는 또 다른 암시가 있다.
진보란 좋은 생활 수준의 유지를 뜻하고 민주주의란 중간계층의 형성 즉, 학생이나 지식인층을 말하며 국가란 연합전선에 상부층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 나간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듣는 이들은 이러한 새로운 슬로건에 전혀 놀랄 일이 없었는데 우선 민주캄푸치아가 다시 권력을 잡았을 경우에 이 세 가지 슬로건이
더 쓸모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릴 것이고 가장 敵性적인 계급층 출신에 대해 장래에 차별-학대를 않는다는 보장도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도 그 수많은 슬로건이 그랬듯이 끝이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 모든 게임의 귀추는 결국 재집권이었기 때문이었다.
민주 캄푸치아의 역사에 언급하여 폴폿은 1975년이야말로 2천년 역사이래 처음으로 기본 인민들이 국가의 권력을 차지한 해였으며
빈민들이 권력을 장악했던 것은 세계 역사상 처음이라고 볼 수 있는데 1871년의 파리 코뮌 혁명은 곧 자본주의자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해 버렸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당의 지식층 지도급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는데 타목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기본 인민 출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신에 폴폿은 듣는 이들이 정말 내가 민주 캄푸치아에서 권력을 쥐었구나 하는 착각이 들게 하였다.
당시 청중들의 대부분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는데 거의가 1970년대에 게릴라에 참가했던 빈농 출신으로 이미
대대장이나 연대장 급으로 진급이 된 자들이었으며 또 독종인 남서 지역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혹평을 피하고 또 체제가 합리적이라는 면을 보여주기 위해 폴폿은 집권 당시를 '우리들의 승리'라는 말과 또 '우리들의 실수'라는
말을 같이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승리의 비중이 실수를 훨씬 능가하므로 민주 캄푸치아는 어디까지나 옳은 정책이었고 또 전술적으로도 옳았다는 주장을 빠트리지
않았다.
4개년 개발 계획에 대해서는 잘 되어 가고 있었지만 우리가 자본력이 너무 약했을 뿐이었다 라고 변명하면서 그러나 우리는 베트남이
우리를 따라오지 못하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시는 베트남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게 할 것이다 라고 첨언했다.
폴폿은 4개년 계획이 완전히 실패해 버렸고 또 많은 인명의 손실을 보았다는 것은 전혀 언급치를 않았다.
실수 부분에 가서는 몇 가지 크고 작은 실수가 있었는데 정치적인 실수, 조직의 실수 그리고 민주 캄푸치아의 상부에서 하부까지
다 실수가 있었다고 했지만 누구라고 꼬집어 말하지도 않았고 또 어느 개인이나, 정치단체나 또 지역이나 정책 자체 그 어디에게도
책임을 돌리지 않았다.
가장 큰 실수는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이었으므로 실수라고 할 수가 없다고 했는데 즉 처음으로 권력을 가진 기본 인민들이 너무
경험이 부족했었고 또 3년 동안의 기간도 경험을 축적하기에는 너무 짧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 '무경험' 자들이 과거에 물들지 않아 순수하다고 더 선호했던 것은 바로 폴폿 자신이었다.
폴폿은 또 자신과 다른 누구도 행정력이 부족했고 통치 경험이 없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상부에서 하부까지 좀 지나쳤었다는 말로 끝냈다.
지나쳤다는 근거나 예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듣는 이들은 이 대목에서 괜스레 죄지은 자 같이 고개를 숙이고 신발 끝을 보거나 아니면 손톱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 청중들이야말로 실수를 저지르거나 지시를 했던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
7년이 지난 지금, 후회할 여유는 없었다.
폴폿은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에도 실수 한번 않았던 나라는 없다고 자위하는 말도 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승리에 도취되어 허세를 부리던 것과 같이 아직도 민주 캄푸치아는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좋은 국가라고 (1986년에는
가진 땅도 없었고 稅收도 없었고 또 지불할 청구서도 없었지만,) 주장하고 있었다.
폴폿은 또 변명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소련, 중국, 베트남, 미국, 영국, 프랑스 및 호주까지 그 역사를 연구하여 문제점들을
찾아내었다.
우선 소련은 1917 - 1935년 사이(스탈린의 대숙청이 끝나갈 때)에 민주 캄푸치아와 같은 어려움을 겪었었고, 중국은 공산
혁명 후 37년이 된 지금도 경제의 바닥을 헤매고 있고, 베트남은 긴 내전으로 경제 사회는 낙후 될 대로 되어버려 도저히 회생
불가능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어 버렸고, 또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는 그러면 좋은 나라인가? 하고 반문하면서
이 들 소위 선진국가들이야 말로 그 땅의 身土不二가 아닌 침략자들이요, 남의 땅 따먹는 자들이요, 경쟁적 파괴자들이요, 거대한
식민주의자들이며 가장 인권을 많이 침해하는 나라들이라고 했다.
잠시 뜸을 들인 후에 폴폿은 민주 캄푸치아야말로 이 따위 나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 차원적인 수준의 나라이며 한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하거나 빼앗은 일이 없었다고 자랑을 하였다.
마지막에 그는 의외로 나폴레옹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는데 나폴레옹이야말로 쿠데타로 집권하여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동서 유럽을 모두
정복하면서 많은 전화(戰禍)를 입혔는데 일말의 가책이나 후회도 한 일이 없다고 했다.
이어서 그는 19세기에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 캄보디아에 많았지만 그 누구도 독립에 힘이 되지는 못했다고 하면서
(그러나 월맹의 딘빈푸 전투 승리가 결정적인 영향이었다는 것은 물론 감추고) 이들과 민주 캄푸치아 중 누가 더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가라고 묻고는 당연히 민주 캄푸치아가 역사 속의 영웅들 보다 더 훌륭하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2천년 캄푸치아 역사에서도 민주 캄푸치아가 가장 우수하고, 실속 있었고, 개성이 확실했으며 또 가치가 있었다고 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청중들에게 19세기의 독립 투쟁 영웅들, 그리고 프랑스 제국주의자들과 민주 캄푸치아의 승리와 미래를 비교하도록
유도하면서 민주 캄푸치아와 자신이 동격으로 보일 수 있는 방법으로 "나"라는 말을 쓰지 않고 "P
P"라고 자신을 지칭한 것이다.
비록 실수는 있었지만 민주 캄푸치아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보다도 더 나은 정치를 했다고 했다.
그 결과로 개성이 확실했고, 승리자이었지만 실수도 있었다는 것이었는데 이 부분은 듣는 이들이 모두 공감을 가지면서 한편 안도하는
부분이 확실했다.
우수했었다는 말을 듣고는 청중들은 어떤 변화를 해야할 필요나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나"라고 하지 않으면서 3인칭 적인 "P P"를 쓰고 또 다른 나라의 나쁜 경우를 열거하면서
폴폿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과연 폴폿과 대대장들이나 연대장들은 1990년대에 다시 캄보디아를 통치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지?
폴폿은 나타났다가는 잠적했고, 통치를 하면서도 안 하는 척 했고 평등하게 대하는 척 하면서 생사를 좌우했고, 부드럽게 얘기할
때는 잔학하고 폭력적이며 독선적인 면이 감추어져 있었음을 많은 이들이 겪었던 것이다.
대 화
1980년 후반이 되면서 동서 냉전 기류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관심은 동남아시아의 대륙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는데 이 관심의 이동은 캄보디아의 각 파들과 외국의 세력들이 캄보디아 사태를
정치적 대화를 통해 조기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가속화되기 시작한다.
국제적 세력이 캄보디아에 편중되기 시작한 큰 원인으로는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쵸프 대통령의 개방 자유화 정책으로 동구권 국가들의
공산주의 사상이 부식(腐蝕)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도 미국과의 화해무드에 시장 개방 정책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필요한 제도적 장애물 제거 작업을 서서히 하고 있었다.
태국의 정계도 군부 중심에서 경제 전문 민간인 쪽으로 서서히 이양이 되어 가고 있었고 이들은 끝이 안 보이는 캄보디아 내전을
지원하는 것이 아무 이득도 없을 뿐 더러(무기 장사가 짭짤했던 군부는 아니지만) 냉전의 화해무드 속에 베트남과도 마냥 담을 쌓고
적대시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바람은 곧 베트남과 캄보디아, 그리고 태국-캄보디아 국경 지대에도 불어 닥쳤는데 소련이나 공산 블록에서 베트남과 캄보디아-크메르
루지 및 프놈펜 정부 공히-에 대한 원조가 현저히 줄어들거나 또는 중지되었고 또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주둔하고 있는 20여만 명의
베트남군 유지비에 큰 부담을 안고 있었다.
또 베트남 자신도 시장 개방을 서두르고 있었으며 방위예산의 삭감을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 때였다.
결국 베트남도 캄보디아에서 철군을 해야만 미국으로부터 외교적 인정을 받을 수 있고 또 긴장된 분위기를 완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1980년 이후부터는 사실 해마다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의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었는데 1989년 9월에 마지막 8만 명의 베트남군이
외신 기자들을 다 불러 놓은 자리에서 큰 철군 행사를 치르고는 베트남으로 떠났다.
비밀스레 잔류한 베트남인들은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에 필요한 일부 기술자 및 정치-행정 고문들이었다.
베트남군이 철수하자 놀랍게도 프놈펜 정부는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는데 그 동안 대중의 요구가 많았던 경제부분의 통제를 완화하고
종교활동의 자유는 나이 제한을 철폐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국교로 지정하였으며 철군 직전에 법령을 통과시켜 국민들이 부동산의
매매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하였다.
요즈음 수십만 달러가 나가는 프랑스 풍의 호화 주택도 이 때는 원 주인들은 거의 죽어버렸으므로 점유자들에 의해 겨우 몇 백 달러에
거래되고 있었다.
이 세 가지 정책은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프놈펜 정부(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의 이러한 민심 수습작전에 폴폿은 그 대응책으로 1989년 자신이 영원히 정계에서 은퇴한다는
선언을 한다.
베트남군이 완전 철군을 하자 연합 정부 군대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가능한 많은 외곽 지역을 점령, 차지하여 정치-경제의 바탕을
확보하려 하였다.
1990년에 크메르 루지군은 서쪽 끝에 있는 폐허의 마을 파일린을 점령하는데 중요한 의미는 이 곳이 루비와 사파이어가 지표면에서
채광이 되는 중요한 보고(寶庫)라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 채광된 루비와 사파이어는 연합정부 군대의 주요 재원이 되었고 또 태국의 무기 상인들은 크게 재미를 보았다.
또 이 지역에 유달리 많은 자단목이나 홍목 같은 고급 목재들도 역시 벌목하여 태국에 팔아서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
1992년에 연합정부의 일원인 크메르 루지들은 해외투자 기구를 만들어 단독으로 이 지역에서 보석, 목재, 국경 밀수 등으로 1억
달러를 넘는 수익을 올렸으며 완전 자립 경제의 기반을 구축했다.
크메르 루지 지도급들은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하여 태국계의 기업을 설립하고는 계속하여 투자 사업에 열을 올렸으며 사업의 파트너인
태국의 군부는 크메르 루지를 크게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1989-1990년 사이에 크메르 루지는 드디어 연합정부나 프놈펜 정부 사이에서 홀로 서기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사이에 드디어 또 대화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호주 및 인도네시아 등이 연합정부와 프놈펜 정부간에 화해를 하라는 압력을 주기 시작했는데 정치적으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화해를 방해하고 있던 중국, 태국, 미국에게 쐐기를 박는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이 후원자들은 연합정부에게 프놈펜 정부의 훈센 수상과 대화를 하라는 압력을 계속 넣었는데 이 때 훈센은 해외에 있는 캄보디아
사회에 많은 지지를 얻어낸 것이 큰 성과라고 할 수가 있다.
1989년에 캄보디아는 끝없는 내전을 종식하기 위한 대화의 당사자로 연합정부와 인민 공화국 2개의 정부가 아닌, 4개 각파의
회담 구도로 바뀌었다.
이것은 프놈펜 정부에 대한 베트남의 충고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태 진전의 추이를 유심히 보며 때를 기다리라는 그들대로의
경험이었던 것이다.
프놈펜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우선 연합정부가 무너지고 분산된 꼴이 되었고 감추어져 있는 폴폿-민주 캄푸치아를 다시 물위로 노출시키는
효과를 본 것이었다.
연합정부의 실세인 폴폿만 노출시키면 국제적인 비난의 화살을 피하기 어려우므로 상대적으로 프놈펜 정부가 국제적 여론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입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 눈치를 챈 민주 캄푸치아는 변방을 석권할 때까지 고의로 이 대화를 늦추었다.
1990-1991년 드디어 크메르 루지는 수가 막히기 시작했는데, 발단은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와해되어가자 그 여파가 아직 공산주의를
강하게 지키고 있는 베트남과 중국에도 미쳐서 이들이 캄보디아에 대화를 종용하게 하였고 그럼으로써 중국은 우방인 캄보디아를 계속
유지할 수 있고 또 베트남은 자국의 공산주의 체제가 위협을 받지 않는 장래 분위기가 될 것으로 분석하였던 것이다.
1987년과 1991년 사이에 이 4파들간의 대화가 프랑스,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서 진행되었다.
국제적인 여론을 고려하고 또 서로 많은 지지를 얻기 위해 민주 캄푸치아는 국기와 험한 구절의 국가를 없앴으며 훈센의 인민 공화국도
국호를 캄보디아 국(State of Cambodia)으로 바꾸고 또 바꾸는 김에 국기도 바꿨다.
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5개국(프랑스, 중국, 소련, 미국 및 영국)은 캄보디아의 정치적 화해에 지원을 약속하였고 유엔은
또 캄보디아의 복수 정당 정부의 수립과 총선거에 감시단을 파견하겠다고 하였다.
1991년에 드디어 4개 파가 참가한 캄보디아 국가최고회의(Supreme National Council for Cambodia)가
구성이 되었다.
이 최고회의는 국내에 두기로 하고 선거는 1991년 말 유엔 감시단이 입국할 때까지 우선 보류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1991년 10월에 파리에서 관계국들이 동참한 가운데 드디어 캄보디아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게 하였다.
혼란의 와중에서, 증언자들의 말에 의하면, 폴폿은 무슨 속셈이었는지 자신이 만만했다고 하며 상황이 '부드럽고 시원하게' 진행된다고
하면서 전혀 당황하거나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1988년 이후
1988년이래 폴폿에 관한 루머들과 간간이 노출되는 사진들이 폴폿에 대한 정보 전부였다.
어린 딸을 안고 다니는 모습과 북경의 병원에 입원한 것과, 창문은 전부 검게 선팅을 한 흰색 4륜 밴을 타고 태국 쪽의 도로를
이용하여 국경 주변의 기지를 돌아다니는 것 등이었다.
기자들이 접근을 하려해도 더 이상은 불가능하였다.
1989년 제임스 프링글 이란 기자가 북경의 한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을 입수했는데 10년 전인 1979년에 찍은 것이지만 폴폿의
머리카락은 반백으로 변하여 있었다.
1989-1990년 사이 크메르 루지를 이탈한 사람들의 진술로는 그와, 그 일당들이 과거의 이념을 그대로 가지고 다시 집권하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폴폿의 이념이나 방법론은 1950년대에는 가능한, 어울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1990년대 초의 폴폿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지난 35년간 어떤 형태로든 계속 남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
1990년에 이탈한 자들이 87호 본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태국의 남부 해안도시 뜨랏에서 몇 킬로미터 안쪽에 위치한
원형의 기지로 대략 300mx500m의 넓이에 철조망이 2중으로 쳐져있었고 100여 명이 넘는 크메르 루지군인들이 경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출입구는 검은색 군복을 입은 태국 해병대들이 지키면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고 기지 안에는 폴폿이 거주하는 집과 처와 딸이 거주하는
집이 별도로 있었으며 당원들의 교육을 위한 6개의 막사가 있었고 주방과 식당이 따로 있었다.
또 폴폿의 집 주위에 경호원들이 묵는 오두막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과거 캄보디아의 공공시설이 거의 비슷한 구조를 보이듯이 이 87호 기지도 불교 수도원의 구조와 흡사했다.
또 당원 교육이나 당 대회 절차도 사실 불교의 불사(佛事)절차와 비슷하였다.
굳이 비약해서 비교한다면 폴폿은 '숲 속의 수도승'이나 '도 닦는 도사'의 모습으로 보이려 한 것 같다.
이 엄격히 통제된 기지에서 폴폿은 87호 할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크메르 루지군의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들을 교육하고
있었다.
통상 1회의 교육은 14일간이었으며 하루 8시간의 주간 정상 교육과 야간에도 5시간을 더 교육을 하고 매일 저녁에는 꼭 정치
학습이 있었다.
또 당원 교육이 끝나게 되면 수료자들이 원대복귀하기 전에 이틀에 걸쳐 영내 식당에서 회식을 열어 주었다.
교육 중에는 고급 간부들인 손센, 타목, 키우삼판 및 눈체아 등이 각자의 전문 분야를 강의해 주었다.
모두들 폴폿을 좋아했다고 한다.
농담을 잘했고 피교육자들을 따뜻이 보살펴 주었고 교수안 없이도 강의를 훌륭히 잘했었다고 하였다.
폴폿의 강의는 민주 캄푸치아가 반드시 다시 집권한다는 정신 교육이 주였으며 또 다음 한달 간의 주요 전술을 가르쳤는데 주변 국제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여 정치 투쟁과 무력 투쟁의 전술을 교대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1988년 이후에는 정치 투쟁 전술에 더 역점을 두기 시작했는데 UN 감시하의 전국적인 선거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폴폿의 교육 방법은 일방적인 강의를 하다가도 소크라테스 식의 날카로운 문답형식으로 바꾸는 식이었는데 과거 불교의 수도원에서도
그런 식의 교육을 하고 있었다.
한 이탈자가 이 당시의 교육 장면을 증언한 것을 보면,
1988년 3월에 캄보디아의 국내 정세를 강의하던 중에 갑자기 폴폿은 말을 끊고 질문을 던졌는데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였다.
좌 중의 몇몇 대대장, 연대장들이 다른 파들의 부정과 부패를 노출시키자, 우리의 충성심을 강조하자,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자...
등의 대답을 했지만 폴폿은 틀렸다는 듯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자 뒤쪽 줄에 있던 한 졸병 당원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대답하기를, 우리 스스로를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 두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우리를 사랑할 것
같습니다 라고 했다.
그러자 폴폿은 '맞아! 바로 그거야! 그래, 그래!' 하면서 가장 계급이 낮아 보이는 피 교육자가 정답을 내 놓으니 의외로 기쁘고
즐거운 것 같이 보였다고 했다.
친목회 같은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폴폿의 공산주의 교육에는 장래의 방침이 꼭 들어있었고 철저한 보안의 중요성, 전술 그리고 조직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초기의 공산주의 이론 즉,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등은 언급하지 않았다.
또 교육 중에 '당' '사회주의' '혁명' 같은 용어는 절대로 쓰지 않았다.
더 중요했던 것은 1990년대 또는 그 이후의 동남 아시아 정치 기류에 맞추어 캄보디아를 어떻게 다시 부흥하고 또 여기에 봉사할
것인가는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는 또 세계는 변하고 있고 어제의 우방이 오늘의 적이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사실 1960 - 1970년 사이에는 그러한 변화는
없었으므로 실지로 우방과 적이 교차되지 않았던 그 시대에 정치에 몸담았던 그가 이러한 말을 선뜻 한 배경에는 아마 인도의 신화
'마하바라타'나 남방 소승불교의 교리에서 볼 수 있는 악마와 선한 신들이 끝없이 싸우는 것 등이 잠재적 고정관념으로 남아있는,
극히 주관적인, 심지어 피해 망상적인 상태에서 세계를 보는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폴폿의 주관은 단순하고 웅변적이었다.
서면으로 준비된 근거는 거의 없었다.
폴폿은 캄보디아 그 자체에 최면 걸리듯 빠져있었으며 다시 합법적이고 독존(獨存)적인 나라를 재건하여 집권하는 데에만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치 깊은 산 속에서 피신처를 운영하고 있는 수도원 원장 같은 기분으로 독립을 성취하는데 있어 장애가 될 피교육자들의 이질적인
마음을 정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반복되는 엄격한 훈련과 적은 수면시간 그리고 몇 시간에 걸친 훈계, 자아비판, 또 토론 등을 통하여 대대장, 연대장 및 각 사단장들은
새로운 세뇌를 받고 교화되었으며 그것을 또 직속 부하들에게 그대로 전수할 수 있는 중간 매체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면 이 부하들은 또 전국의 인민들에게 그대로 전수할 수 있게 될 것이고 혁명 정신이 캄보디아 전국에 스며들어 궁극적으로 외세가
넘보지 못하는 튼튼한 국가를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혁명이란 단어는 쓰지 않았다.
1990년 한 탈출자는 말하기를, 폴폿은 처음 만나는 자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어 그가 다시 폴폿을 찾아오게 하였고 그의 교육을
받은 자들은 깨우침을 느꼈으며 강의 분위기나 느껴지는 통찰력은 마치 아버지를 대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주었고 누구나 그를 위해
적어도 몇 년간을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며 또 그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다.
다른 과거의 캄보디아 지도자들처럼 폴폿도 정치 단체의 복수(複數)화 조짐을 경각심을 가지고 예견하고 있었는데 경쟁을 도전하는
정치가들은 1979년 이전에 98%의 찬성률을 보였던 민주 캄푸치아의 재건에 방해를 하는 적으로 간주를 하였던 것이다.
1985년에 발생한 정치적 현실 즉 외압에 의한 연합정부 구성을 두고 당에 관하여서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비록 우리가 당을
해체하더라도 계속 당에 충성할 것이다. 8만의 우리 정예 당원들 중에서 적어도 50%는 우리의 맹세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의 힘을 기억하라! 고 말했다 한다.
또 2년 뒤에 당원들에게 한 열을 띤 한 연설에서는, 그 자신의 역할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였다는데,
'나는 이제 늙고 몸은 불편한 상태이다. 캄보디아 내의 인민들이 나를 무서워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저 나쁜
베트남군을 몰아내고 평화를 찾은 뒤에 동지들이 원한다면 나는 은퇴를 하겠다. 그러나 지금 내가 은퇴를 하고 나서 동지들이 베트남군을
격퇴시키지 못한다면 내가 어찌 편히 쉴 수가 있는가? 나는 나의 경험과 지혜를 동지들에게 전수 해 주어야 하며 베트남군들이 철수를
하고 우리가 자주 국방을 할 수가 있을 때 은퇴를 하겠다. 그래야 죽더라도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동지들이
고도의 수준으로 아직 발전하지 못한 것이 나는 안타깝다. 나는 연합정부의 다른 파들이 세력을 잡을까봐 매우 걱정을 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비밀이 조직을 돕고있고 또 동지 여러분들이 충분한 지식을 갖출 수 있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 여러분 자신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마라 또 그렇다고 너무 자신감을 가지지도 말고 냉정해라. 다가올 임무는 매우 중대하다. 모두 정치투쟁을 열심히 하여
내가 그랬던 것처럼 고도의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렇지 못하면 나는 편안히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당시 이 연설을 듣던 많은 당원들이 흐느꼈으며 폴폿의 이상이 실현되는 그날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기로 맹세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폴폿이 '동지들이 아직 고도의 수준으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말한 대목은 마치 성자(聖者)들이 쓰는 표현 같았으므로 듣는
이들에게는 마음깊이 닿는 겸손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폴폿은 확실히 선각자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1992년이 되자 인도지나 반도의 다른 나라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1호 동지'에게도 사건의 연속이 들어 닥쳤다.
캄보디아의 각 파들에게는 평화를 위한 대화를 시작하라는 압력이 가중되었고 시아누크 파와 크메르 루지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내전을
포기하라는, 어쩌면 그들에게 유리할 수도 있는 압력이 주어졌다.
손산에게는 또 공산주의와 다름없는 다른파들과 협력하라는, 민족주의자인 손산의 정치적 주관이나 입장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운 압력이
떨어지기도 했다.
한편 훈센의 캄보디아 국(State Of Cambodia -SOC)도 민주 캄푸치아를 범죄 집단 취급하던 것을 그만두고 인정하여야
했고 국가의 자주 독립권을 그들의 손으로부터 유엔에 맡겨야 하는 매우 불리한 구도에 처하게 되었다.
조석으로 급변하는 이 상황하에서 폴폿은 1991년 6월에 태국의 파타야에서 가진 회의에서 중대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잠시 나타난
것 외에는 대중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회담장에 은둔하던 그가 나타났다는 것은 아직도 키우삼판을 위시한 그의 동지들이 회의에 아예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폴폿의
자문을 받지 않고는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그 해 말에는 또 크메르 루지들이 태국 군으로부터 구입한 것으로 보이는 헬리콥터 2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국에서 조종교육을
받은 이엥사리의 아들 이엥붓이 주로 조종을 하고 폴폿 및 고위 간부들이 국경에 흩어진 크메르 루지 기지들을 돌아다녔다.
결국 1991년 말까지도 폴폿은 남은 민주캄푸치아를 실질적으로 통솔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의 은퇴 운운한 것은 전술적인 위장이었던
것이지 정말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나 주위 측근들의 눈에, 또 동지들이 원한다면, 그는 계속 영원한 1호 동지였던 것이다.
정 리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폴폿을 과거의 제물로 캄보디아의 국경지대에 많은 감시병을 붙여 묶어두는것도 흥미 있는 발상일지도 모른다.
그가 불교의 법륜(法輪-차크라)를 인용하여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린다는 말을 한 일은 있었지만 공산 독재자로 다시 프놈펜을
장악하고 권력을 쥘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정치적 입지의 중요성이 희박해 지면 그것은 정치적 생명이 끝났다는 것이지만 아직은 그가 할 일이 조금은 남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폴폿의 앞날이 아직 펼쳐져 있으니 재집권의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고 폴폿은 이제 완전히 끝났다고 하기에도 너무 이른
것 같았다.
또 그의 긴, 영향력이 컸던 과거를 보면서 아무런 평가 없이 덮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었다.
1991년에 폴폿의 동료들은 그를 정치적 대립상태의 앞 장군으로 세우는 데에 더 이상 전략적인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었고 또
식상하기도 했다.
캄보디아 역사에서 보면 큰 외국 세력이 마음대로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기가 쉬웠는데 왜냐하면 지도자들은 생각하는 게 게을러서인지는
몰라도 강대국들의 후원이 영구할 것으로 쉽게 믿고 또 강대국들에게 속기를 잘 했기 때문이다.
폴폿도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외국의 영향력을 자의나 타의로 쉽게 받아들인 순진하고 경솔했던 과거 지도자들과 같았다고 볼 수가
있다.
한편으로 독립 승리를 부르짖으면서 한편으로는 항상 외세의 지원에 의존을 하였었다.
그러나 그의 외세 의존은 그리 나무랄 것이 못되었는데 우선 캄보디아가 절대 부족한 것을 의존하였고 또 공산주의 운동 때문에 생긴
취약 부분을 보완하였기 때문이다.
때로 캄보디아가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고립된 섬과 같다고 쇄국을 자랑삼아 주장한 지도자들이 과거에 있었고 그러한 주장이 관심과
동조도 받고 또 거기에 자부심을 갖기도 했는데 20세기말에 와서 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 또 냉정한 자본주의 세계의
틈바구니에 완전히 끼어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캄보디아 권력자들의 독선적인 꿈과 또 쇄국은 왜, 어떻게 그리 오랫동안, 또 많은 크메르인 지도자들 사이에 고집스레 또
변함없이 연속되고 있는가하는 질문은 답을 구할 수가 없는, 그러나 꼭 알아내야 할 필요한 질문인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고집과, 폴폿의 좋았던 건강과, 또 그의 군대가 수년간 캄보디아의 여러 곳에 은닉한 많은 무기들 때문에, 후원국들이
원조를 중단했다는 이유만으로 크메르 루지가 끝났다는 말은, 특히 군사적인 면에서는 절대로 할 수가 없었다.
또 크메르 루지가 새로운 다원(多元)적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제도하의 캄보디아에 복수 정당의 일원으로 흡수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들은
민족자결주의자로, 이데올로기 창도자로, 또 게릴라로 상당한 사람들의 지지를 분명 받을 것이기 때문에 '없어졌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이들의 민족자결주의적인 적성은 다른 것에 비해 그래도 비난을 받지 않은 것이었다.
1990년대에 다른 파들과 공조하면서도 변질되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크메르인들이며 이들이 망명 중일 때는 훈련이 잘 되어 있었고, 잘 무장되었고 또 가장 사기가 충천한 캄보디아 군인이었다.
그리고 상당수 국민들이 폴폿을 떠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그가 집권 중일 때 성취한 것이, 또 국민들에게 준 것이 무엇인가를
잘 검토해 보아야 한다.
폴폿의 미래상은 15세기 앙코르 제국이 멸망한 뒤부터 다른 모든 지도자들이 꿈을 꾸었던 강력한 캄보디아 건설이었다.
대부분 그러한 야망에 압도당했고 또 현실로 이룩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물론 대다수를 이루는 많은 사람들은 캄보디아의 자원 개발에 관한 미래상을 위해 무리하게 어둠 속에 뛰어들므로 치렀던 댓가, 충분한
검토를 거치지 많은 개발 사업의 우선 순위 등에 대한 비난을 서슴지 않지만.
폴폿도 어떤 면에서 캄보디아 역사상 몽상적이었던 지도자들 중의 하나였다.
그의 인생 중에 파리에서, 또는 그 이전에 한 때 캄보디아 사람들의 비굴함과 자포자기 적인 침묵을 공격한 일이 있다.
왕족들이 어릴 때 그의 기를 꺾어 버렸지만 캄보디아가 낙후하고 있는 것을 걱정한 것은 진심이었으며 다른 지식인들과 공감을 하던
부분이기도 했다.
1950년대 초에는 캄보디아의 계급사회, 불평등, 비굴함 등을 없애기 위해 공산주의 이론의 맥락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이러한 운동을 했던 지식층들의 결정적인 역할은 당시 대부분 가족 중심이나 종교 중심적으로 생활하던 평범한 절대다수의 빈곤층 사람들에게
큰 야망을 위해 그 모든 것을 버리도록 강요한 사실이다.
폴폿의 경우에는 그러한 야망이 더 개인적인 것이었다.
폴폿은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큰길을 그 자신을 내세우는 한 방법으로 보았고 더러 남을 억누름으로써 그 강도를 더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 그 자신이 감수한 개인적인 생활의 희생도 상당했다.
이 때까지도 그는 가족생활을 거절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1975년 이후 많은 경우에 그는 양보나 남에게 교감을 갖는 것을 거부했다.
오히려 1981년에는 너무 남을 믿었기 때문에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다.
그는 또 1950년대부터 자신이 선택한 노선 이외에는 한번도 옆길을 가본 적이 없었고 또 그 자신의 미래상을 이루기 위해 희생당한
캄보디아 사람들에 대해서도 한번도 언급을 한 일이 없다.
그 자신의 목적을 변경하거나 또는 버리는 것은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과민할 정도로 신경을 쓴 그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안전을 위해서 책임이나 후회가 따를 수 있는 어떤 변화를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1975년 이후 폴폿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실지로 현장에서 뛰었던 많은 간부들은 그로 인해 백만이 넘는 동포들을 죽게 만들었던
사실과 책임에 그저 조직이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이다라고 변명할 것이다.
마치 폴폿이 혁명의 과정에서 피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고 하듯이.
어쨌든, 국경에 선 이 늙은 폴폿이야말로 비록 그가 모든 실패의 원인을 남에게 씌우려 능숙한 말장난으로 애쓰고 있어도 그 모든
책임을 최종적으로 감당해야만 할 자임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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